[경상시론]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도시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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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도시를 바꾸다
  • 경상일보
  • 승인 2025.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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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안태 울산안전(주) 대표이사 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국장

최근 정부는 ‘산재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중대재해 예방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경험이 말해주듯, 안전은 제도나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안전은 태도이자, 문화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습관으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실체를 가진다.

2009년, 필자가 안전보건공단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한 직원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늘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왜 기술이 발전해도 산업재해는 줄지 않을까?” 오랜 고민 끝에 그는 한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안전은 기술이 아니라, 문화에서 비롯된다” 그가 말한 ‘안전’이란 제도나 설비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의식과 습관 속에서 만들어지는 생활의 문화였다.

그 무렵 울산은 산업현장 중심의 안전관리는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시민 차원의 안전문화는 여전히 미흡했다. 그는 이 문제를 바꾸기 위해 울산시에 ‘안전도시 울산 만들기’ 사업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재난안전과에서 산업재해는 “지자체 업무가 아니다”라며 거절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기획안을 다듬어 보건위생과에 제출했고, 이번에는 문이 열렸다. 그렇게 울산시·경상일보·안전보건공단·음식업중앙회 울산지회가 함께하는 시민 참여형 안전문화운동이 시작됐다.

이 사업은 기술 중심의 산업안전을 넘어, 시민의 행동과 생활 속 안전운동으로 나아간 첫 시도였다. 울산시와 안전보건공단은 실무협의회를 꾸렸고, 경상일보는 연중 특집보도로 시민 안전 의식을 확산시켰고, 음식업중앙회 5개 지부가 동참하면서 사업은 빠르게 확산됐다.

그는 특히 배달노동자의 안전에 주목했다. 당시 울산에는 약 2000명의 이륜차 배달원이 있었지만 헬멧 착용률은 매우 낮았다. 그는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상징’으로 노란색 안전모 2000개를 제작해 보급했다. 노란 안전모를 쓰고 울산 시내를 달리는 배달노동자들의 모습은 시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듬해인 2010년, 울산광역시는 ‘안전도시 울산 만들기’ 사업의 성과를 인정 받아 전국 안전문화 경진대회 1위를 차지했고, 이 안전도시 모델은 서울시를 비롯한 전국 지자체로 확산되었다.

그의 열정은 울산에서 멈추지 않았다. 창원으로 발령된 이후에는 ‘안전도시 경남 만들기’를 제안해 경상남도 자원봉사센터와 협업을 이뤄냈다. 대기업이 안전모를 기부하고, 자원봉사자들이 주말마다 소규모 건설현장을 찾아가 노동자들에게 직접 안전모를 씌워주는 ‘안전 나눔 운동’이 이어졌다. 경남의 소규모 건설현장들이 하나둘 ‘노란 안전모의 물결’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은 산업안전을 지자체 자원봉사 마일리지 제도와 연계한 첫 사례로 평가받았고, 2012년 경남도와 전국 안전문화 경진대회에서 다시 한 번 1위를 차지했다.

이런 흐름은 선진국의 정책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영국은 1988년 파이퍼 알파 해양플랫폼 폭발사고 이후 ‘안전문화’를 국가 정책 개념으로 정립했다. 일본은 고베 대지진(1995)과 JR 탈선사고(2005)를 겪으며 학교·기업·지역사회가 함께하는 ‘국민안전문화운동’을 전개했다. 미국 역시 “안전은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원칙 아래 공공·민간이 자율적으로 안전문화를 평가·개선하는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결국 선진국들은 기술 중심의 안전관리에서 벗어나 국민 안전문화 의식과 행동양식의 변화를 안전정책의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 안전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문화의 수준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전국의 지자체들은 앞다투어 안전도시 사업을 추진되고 있다. 울산시는 시민안전실을 신설했고, 2020년 UN 방재안전도시, 2023년 UN 재난복원력안전도시 인증을 받았다. 돌이켜보면, 한 사람의 문제의식과 실천이 도시의 문화를 바꾸는 변화의 씨앗이 된 셈이다. 그의 이야기는 결국 필자에게 한 가지 믿음을 남긴다. “한 사람의 생각이 세상을 움직인다.”

안전도시는 제도나 설비로 완성되는 도시가 아니다. 모든 시민의 마음속에 ‘안전’이 자연스러운 생활 습관으로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진정한 안전도시가 된다.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값진 사회적 자산이며, 오늘의 우리가 이어가야 할 신념이다.

정안태 울산안전(주) 대표이사 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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