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규만의 사회와 문화 (72)]동지팥죽과 벽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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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만의 사회와 문화 (72)]동지팥죽과 벽사력
  • 경상일보
  • 승인 2025.12.2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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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규만 울산대 명예교수·영어영문학

필자가 사는 시골동네 부녀회에서 만든 팥죽을 먹었던 동짓날이 지난 지 이틀째이다.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음력을 사용하면서도 태양력을 기반한 24절기를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 동지(冬至)는 24절기의 하나로 글자 그대로 ‘겨울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북반구에서는 태양이 가장 남쪽으로 기울어져 밤의 길이가 일년 중 가장 긴 날이다. 역으로 낮이 가장 짧은 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양력으로 12월22일, 23일 경이다. 1년 중 가장 긴 밤을 가진 동지를 지나면 낮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다. 새로운 빛의 세상이 시작된다. 빛은 자유와 희망을 주고 어둠은 억압과 절망을 준다. 무섭거나 사악한 일들은 대개 어둠 속에서 발호한다. 5.16 군사정변과 12.12 군사반란, 6.25 남침 그리고 최근에는 12.3 비상계엄 모두 늦은 밤이나 새벽에 일어났다.

동짓날 먹는 팥죽은 건강식품일 뿐만 아니라, 팥의 붉은 색은 동양에서 강력한 문화적 상징이다. 우리 민속에서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벽사(辟邪)의 힘을 가진다고 믿는다. 팥죽을 먹음으로써 악귀의 기운이 극에 달하는 동지에 액운을 막고, 광명의 새날이 도래함을 알리고, 새알심을 넣어 한 살 더 먹는다는 의미를 덧붙여 건강을 기원했다. 우리나라의 시골마을과 여러 절에서는 지금도 팥죽 나눔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한편, 기독교를 믿는 서양에서도 동지는 강력한 종교적 상징이다. 성탄절이 12월 25일로 제정된 연유는 예수의 실제 탄신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의 ‘새로운 시작과 소생’을 예수탄생 기념일로 동짓날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동지를 지나면서 우리는 악귀와 액운을 떨쳐버리기를 욕망한다. 21세기에 동지팥죽을 먹는 우리 국민에게 악귀는 무엇일까? 빨리 떨쳐버리고 싶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국가적 난제일 것이다. 때마침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은 지난 5월 ‘2025 국가난제 국민체감인식’ 보고서를 발간했는데 ‘국민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적 도전과제’ 1위는 지난해에 이어 ‘인구구조 변화’가 최악의 국가난제로 선정됐다.

구체적 내용으로 수도권 과밀화, 수도권과 비수도권간 양극화, 도시와 농촌간 양극화, 지역 경제·산업붕괴, 지역인구 소멸, 청년 경제인구의 수도권 유출 등을 포함한다. 2위는 가짜뉴스나 사이버공격 등 신종 위험요인으로 발생하는 사회불안이 급부상했다. 뒤를 이어 3위는 지역소멸 위기 등 국토불균형, 4위는 주거, 물가 불안정에 따른 국민 생계불안이었다. 5위는 의정갈등이나 신종 감염병 등에 따라 위협받는 국민건강 이슈의 급부상이었다.

정부와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이는 우리가 합심해 대항하고 극복해야 할 난제이며 악귀들인 셈이다. 어려운 시절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을 푸는 데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사악함을 누르고 책무를 다하겠다는 삶의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 이를 문학적으로 잘 표현한 시가 있다.

미국의 국민시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유명한 ‘눈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 시의 시간배경은 동짓날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동짓날의 별칭인 ‘한해의 가장 어두운 저녁’(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을 난제가 쌓여있는 어려운 시절임을 암시하면서 새로운 삶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젊은이에게는 인생의 유혹적인 안온과 ‘그냥 쉬었음’에서 벗어나 더 적극적인 삶을 그리고 나이든 노년에게는 죽음을 앞두고 공동체를 위한 책무를 다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한다.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다운데/ 그러나 나에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대한민국의 굵직한 난제들이 붉은 팥죽의 힘으로 만백성의 소원대로 슬기롭게 극복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규만 울산대 명예교수·영어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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