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7장 / 정유재란과 이중첩자 요시라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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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7장 / 정유재란과 이중첩자 요시라 (102)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5.12.24 0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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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울산 무룡산과 주변 일대에서는 왜군과 의병 등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장편소설 <군주의 배신>의 주 배경이 되고 있는 무룡산에서 내려다 본 태화강 전경. 울산시 제공

꽃피는 춘삼월, 어느 저녁 무렵에 마동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마동마을 처자인 옥화와 송내마을 총각인 천동의 혼인날이다. 그동안 두 사람은 남들의 눈을 피해서 마동마을 뒷산 골짜기에 있는 도화등에서 꿀맛 같은 세 번의 만남을 가졌었다. 도화등이라는 이름은 복숭아꽃이 활짝 피면 그 모습이 마치 등을 달아놓은 것처럼 골짜기가 환하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다.

천동과 옥화는 이미 옥화 부모님의 승낙을 받은 상태라서 의혼절차를 생략하고 지지난달에 납채(納采)를 했다. 천동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사주단자를 만들고, 사고무친의 고아인 관계로 납채서를 직접 작성해서 신부집으로 보냈다. 답례로 옥화의 부모들은 복서(復書)와 연길(涓吉)을 보내왔다. 칠 일 전에 오방주머니, 청홍채단, 거울, 기러기 한 쌍과 예물을 함에다 넣고, 오색명주 오 폭으로 함을 싸고, 무명 한 필을 끈으로 맨 후에 동무들을 앞세우고 마동마을로 갔었다.

전란 중이라서 많은 것을 생략했다. 신부인 옥화는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서 함진아비를 맞이했고, 천동의 동무들은 탁주 한 대접 얻어먹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왔다. 납폐(納幣)행사는 약식으로 치렀다. 신랑이 혼례를 치르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에 하던 초자례(醮子禮)도 천동이 부모와 일가친척이 없는 혈혈단신인 관계로 생략하고 신부집으로 갔다. 신부집에서는 대례(大禮)를 위한 초례청(醮禮廳)을 차리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삼에 족두리를 한 신부와 사대관모를 한 신랑이 마주보며 서자 전안례(奠雁禮)의 절차에 따라서 혼례가 진행되었으며, 교배례(交拜禮)·서천지례(誓天地禮)·서배우례(誓配偶禮)·근배례(근杯禮)를 마지막으로 대례가 끝이 났다.

남해안에 상륙한 왜군들이 언제 다시 전쟁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혼인을 미루고 싶지 않아서 날을 잡고 혼례를 강행한 것이다. 천동에게 물고기 한 마리 얻어먹지 않은 동네 사람들이 없기에 송내마을 사람들은 죄다 잔치에 참석하여 둘의 혼인을 축하해 주었다. 그 밖에도 천사장 이눌 장군이 몸이 아프다며 사람을 시켜서 건어물을 보내왔고, 보부상단의 대산 형님 역시 상단을 통해서 비단과 무명 등의 천들을 보내왔다.

송내마을은 물론이고 마동, 괴정마을도 마을 사람들은 주로 노약자였고, 젊은 사람들은 관군이나 의병으로 참전하여 죽거나 왜인들에게 끌려가서 난이 일어나기 전과 비교하면 인구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천동의 거지패 친구들도 대부분 보이지 않았다. 집례는 마을의 최고 연장자이시고 명창 할아버지로 통하는 차 씨 아저씨가 해 주었고, 멀리 있는 송현마을의 농악패까지 불러서 제법 잔치 분위기를 냈다. 혼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났으나 천동과 옥화는 파김치가 된 몸으로 첫날밤을 치러야 했다.

천동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기어이 창호지로 된 문에 침을 발라서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고는 두 사람의 합방을 침을 삼키면서 지켜보았다. 신랑인 천동은 신부와 술 석 잔씩을 마신 후에 족두리를 벗기자마자 서둘러 불을 껐다. 좀 더 지켜보지 못하는 탄식소리가 들려왔으나 이내 조용해졌다.

글 : 지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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