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의 불역유행(不易流行)(30)]연말이면 늘 생각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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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민의 불역유행(不易流行)(30)]연말이면 늘 생각나는 사람들
  • 경상일보
  • 승인 2025.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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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철민 울산대 교수 전 울산시 국제관계대사
▲ 박철민 울산대 교수 전 울산시 국제관계대사

“벗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먼 길을 걸어갈 수 있었겠는가? 친구와 가는 길은 먼 법이 없다.” 지난 10여년간 사무실에 걸어두고 늘 보면서 즐기는 오랜 벗의 글이다. 친구를 네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가 칭우(秤友), 둘째는 화우(花友), 셋째는 산우(山友), 넷째는 지우(地友)이다.

다행스럽게도 우정을 저울질하면서 이익이 있을 때만 친한 척 행세하는 친구는 없다. 좋을 때만 찾아주는 화우도 많지 않다. 어딜 가든지 한결같이 곁에서 좋아해 주고 격려해 주는 지우와 늘 같은 자리에 있어 도움이 필요할 때 찾을 수 있는 산 같은 이들이 적지 않다. 비교적 인생을 잘 산 듯하다. 그 친구들과 을사년 세모나 병오년 새해에 만나 막걸리 한두 잔 같이 하고 싶다.

친구는 아니지만 이맘때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향긋한 사람내음 그득한 두 분의 이야기를 불역유행 독자분들과 나누고 싶다. 한 분은 모스크바에서 만난 복덕방 주인 ‘드미트리 김’이다. 2008년 2월 모스크바 부임 후 이틀째부터 살 집을 구하러 다녔다. 1990년대는 모스크바 주택사정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신축 아파트가 많지 않아 물량은 적었지만 ‘우뻬데까’라고 불리는 러시아 외교부에서 운영하는 쓸만한 아파트들이 있었다.

구소련시절 자국 외교관들이 모스크바에 복귀하면 나눠 주던 작은 평수의 아파트 수 채를 헐어서 널찍하게 개조해 서방 외교관들의 눈높이를 맞췄다고 했다. 그런데 2000년 초부터 러시아 경제가 활기를 띠면서 부동산 가격은 하루 다르게 천정부지로 올랐다. 임차인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중산층이 모여 사는 신흥거주 지역 내 아파트 한 채 가격은 평당 수천만원에 이르렀고 20여평 규모의 월세도 4000달러가 넘었다. 임대차 계약은 원칙적으로 1년만 유효했고, 계약서에 3년 보장조항을 명기했더라도 집주인이 “월세를 올려주든지 아니면 나가시오”라고 소리치면 계약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당시 러시아 국내법상 임차계약의 유효기간은 1년이었고 이듬해에 1000달러 가까운 인상을 요구해 오면 쫓겨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매년 외교부 본부에 모스크바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 달라고 요청해봤자 묘책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조지아와의 전쟁으로 러시아에 대한 해외투자가 급감하면서 외환이 이탈했고 집값 오름세는 주춤해졌다. 2009년에 들어서면서 세계적 경제위기가 불어닥쳤고 루불화는 한때 50% 이상 평가절하됐다. 수많은 외국 기업들이 철수하면서 집값은 곤두박질쳤다.

이 기쁨도 잠시뿐, 러시아 경제는 슬금슬금 회복됐고 집값도 다시 동요했다. 이즈음에 김 사장을 만났다. 모스크바 한인사회에서는 미스터 멋쟁이로 알려져 있었고 신규 부임자들이 선호하는 아파트를 기차게 찾아서 계약을 성사시켜 주는 프로 해결사였다. 훤칠한 키에 첩보영화의 주인공처럼 멋지게 생겼고 사할린 출신 재외동포 3세대인데 우리말도 참 잘했다. 단신 부임이었고 주택사정도 안 좋은 편이어서 사무실과의 거리만 맞춰 달라는 소박한 조건을 내걸었다. 김 사장은 나중에 가족들이 오면 통학거리도 감안하면서 무료로 잘 구해 줄테니 걱정말라고 했다. 여러 차례의 이사 경험상, 중개인의 감언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일단 계약서에 서명하고 수수료를 지불하면 그만인 것을.

▲ 늘 이맘이면 생각나는 드미트리 김과 아스만 킴. ChapGPT 그림
▲ 늘 이맘이면 생각나는 드미트리 김과 아스만 킴. ChapGPT 그림
▲ 세계적 작가 Vhils가 울산과학대 동부캠퍼스에 남긴 벽화작품.
▲ 세계적 작가 Vhils가 울산과학대 동부캠퍼스에 남긴 벽화작품.

어렵사리 집을 구해 입주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가족들이 모스크바로 왔고 국제학교 근방으로 이사해야 할 필요가 생겨 김 사장을 다시 찾았다. 엄동 한파 속에서도 1년 전 첫 아파트를 구해주던 그때와 다름없는 열과 성으로 동분서주해 줬고 강아지는 절대사절이라며 완강하게 반대하던 집주인 설득도 그의 몫이었다. 약속대로 복비도 받지 않았다. 한번 뱉은 말은 분명 지켰기 때문에 러시아 땅에서 이만큼 자리 잡을 수 있었다던 김 사장은 계약이 매듭되자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마음이 편하네.”

다음에 소개할 분은 브루나이 ‘아스만 킴’이다. 2002년 봄 네덜란드를 떠나 동남아의 이슬람국가이면서 당시 세상에서 제일 부자였던 국왕을 가진 브루나이로 날아갔다. 원유와 천연가스 생산으로 얻은 국부로 20여만명의 국민들이 모두가 만족했고 ‘브루나이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부자나라였다. 최고급 자동차 수집광이었던 하사날 볼키아 국왕과 왕족들의 자동차 사랑 영향 때문인지 일반 가정들도 유럽산 고급차 한 대를 포함해 2대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북회귀선이 지나가는 지역이라 평균 낮 기온이 32℃에 이르고 매일 일정량의 폭우가 내렸음에도 뚜껑을 열어젖힌 채 달리는 오픈카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국왕이 통치하는 이슬람국가이기 때문에 각종 행사가 종교행사로 진행돼 언제나 길고 지루했다. 매년 한 달간의 라마단 금식기간에는 매일 오후 6시경이 되면 식당마다 무슬림 가족들이 가득했는데, 한결같이 음식을 미리 시켜놓고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던 모습이 흥미로웠다. 한인회 모임에서 처음 만난 아스만 킴은 두 살 연배였는데 늘 겸손했고 배려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한인교민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했던 그는 한국과 브루나이 양국관계 발전을 진심으로 원했고 풍부한 아이디어로 대사관 업무도 적극 도와줬다. 대사관과 교민들 회합 중 분위기가 어색하게 흐르면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고 특유의 씩 웃던 모습은 언제나 멋졌다.

서울로 복귀한 후에도 그가 한국을 방문할 때면 연락을 해왔고 반가운 만남을 가졌다. 그러다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아 수소문해 봤더니 수년 전 자동차 사고로 별세했다고 했다. 아스만 킴이 운전한 차를 타본 적이 있었다. 운전을 조심히 하던 편이었는데 그날은 과속을 했다 한다. 고속으로 20분 이상 달릴 데도 없는데 뭐가 그리 급했을꼬?

박철민 울산대 교수 전 울산시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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