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기업인 동명(東鳴) 서갑호(徐甲虎)의 출생 연도는 사실 문헌마다 다르다. 어떤 자료에는 1915년으로, 또 다른 기록과 증언에서는 1914년이라 한다. 출생지 역시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의 흔적 등으로 삼남면 혹은 삼동면으로 표기되는데, 현재 기준으로 보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하잠리가 바로 서갑호의 출발점이다. 일본 서쪽의 방적왕(紡績王)으로 불렸던 서갑호와 관련된 이러한 정보의 엇갈림은 그가 일찍부터 체계적 이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 곧 제도권 밖에서 삶을 시작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여러 문헌에서 서갑호는 언양공립보통학교(현 언양초등학교, 1906년 당시 언양군 상북면 동부리에 언양청년회가 창설한 사립 영명학교로 시작, 1913년 현재 위치로 학교 신축 이전, 언양공립보통학교로 교명 변경)에 재학했거나 졸업한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삼동면 하잠리에서 그를 기억하는 지역주민들과의 심층 면담 결과에 따르면,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서갑호는 정규 교육 기관에 진학하지 못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서갑호는 1965년의 한일협정 전인 1963년 1월 삼동초등학교(1927년 개교, 초대 박성렬 교장)에 도서관을, 8월에는 당시 같은 교문과 운동장을 사용하던 언양중학교와 언양농업고등학교에 부인 박외득(朴外得)의 이름으로 강당을 지어 기증했다. 만약 서갑호가 실제로 언양초등학교에 재학했거나 졸업했다면, 해당 학교에 대한 기증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필자는 언양초등학교 관계자로부터 창학 이후 언양초등학교를 빛낸 인물 30인과 <언양초등학교 일백년사>(2006) 속에 서갑호라는 인물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러한 정황은 서갑호가 언양초등학교와 직접적인 학적 연관이 없음을 시사하는 간접적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
필자의 상상력을 더해보면 빈농의 아들 서갑호는 지역의 유일한 멀리 재 너머 언양공립보통학교를 다닐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그가 열두 세 살 무렵 걸어서 5분 남짓한 거리에 4년제 삼동초등학교가 새로이 문을 연다. 바로 눈앞에 학교가 새로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또래 친구들이 3학년 또는 4학년에 편입학해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보통학교를 졸업했을 나이인 자신의 처지와 앞날에 대해 많이 고민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법(법률 제1424호, 1963.10.28. 제정)도 제정 전인 그 어려운 시절 도서실도 아니고 도서관을 지어 기증했다는 것은 서갑호의 삼동초등학교에 대한 각별한 기억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또한 교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있던 언양중학교와 그 좌측으로 있던 언양농업고등학교 사이에 150평 규모의 강당을 굳이 부인의 이름으로 기증한 연유는 무엇일까?
서갑호는 열네 살에 고향을 떠나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간다. 엿장수·고물상 등의 잡역에서 시작해 결국 방적왕에 이른다. 그러나 최초로 본국에 대한 외화투자를 실현한 재일동포 1세대 기업인 서갑호가 1957년 7월27일부터 서울 자택에서 사망하기까지인 1976년 11월22일까지 19여년간, 그의 육십 인생의 3분의 1을 다름 아닌 在日한국학교 이사장으로 봉직하며, 기업의 이윤을 공동체 발전을 위해 공유한 육영사업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59년 11월18일자 조선일보 3면 ‘공로자 29명 표창, 23일 대한교련(大韓敎聯) 창립 12주에’라는 기사에 따르면, 대한교련으로부터 재일동포로는 최초로 세 명(김상길 동경한국학원 제2대 이사장, 서갑호, 김영대 금강학원 제2대 교장)이 교육공로자로 표창받았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서갑호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갑호는 제4대 윤보선 대통령 때인 1961년 2월24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재외국민 최초로 국민포장을 수상한다. 이 시기는 문교부가 4·19 혁명의 영향 아래 재일동포 교육 실태조사를 위해 일본에 처음으로 ‘교포교육조사단’을 파견한 시점과 일치하며, 서갑호가 받은 국민포장의 공식 소속이 재일교포 금강학원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재일동포들의 민족학교인 오사카의 학교법인 금강학원의 제2대 이사장이 바로 다름 아닌 서갑호였다. 또한 이날은 중등학교로서 한국 정부로부터 가장 먼저 재외한국학교로 인가 받았다는 점을 큰 자부심으로 삼고 있는 당시 금강중학교 및 금강고등학교가 재외한국학교로 행정처분에 의해 정식 인가를 받은 날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해 재일동포 자녀교육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으며, 재일동포 1세의 모국 지향 및 애국심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한일협정 이전 서갑호의 모국에의 공식적인 데뷔가 교육 분야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방증한다(참고로 서갑호가 한국 신문에 처음 거론된 것은 1959년 3월 5일 조선일보 2면 필드하키 협회 회장단 선출 관련으로 당시 재일필드하키 협회장인 서갑호가 신임 부회장으로 회장단 명단에 있었음).
즉, 재외동포 및 재외국민의 교육과 관련된 한국 법령이 없던 시기, 그의 육영 활동이 단지 교육 후원에 머물지 않고 행정처분으로의 인가이지만,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전의 재외동포 정책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됐으며, 모국인 대한민국에서의 본격적인 기업 활동에 앞서, 교육사업을 통해 한국 정부와의 공식적인 접점이 형성됐음을 시사한다.
정희영 서울대 교육종합연구원 책임연구원 교육학박사
※울주 삼동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간 기업인 서갑호(徐甲虎)! 재외국민 최초 교육 분야 국민포장을 받은 그의 특별한 여정을 다시 만난다. 울산에서 출발해 교육과 기업, 나라 사랑으로 이어진 재일동포사의 숨은 궤적을 6회에 걸쳐 되짚는다. 편집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