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라도 태어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가장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혼례를 올리고도 그 느낌을 제대로 알 수 없었는데, 오늘 그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자신이 만든 울타리로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이 행복하고도 무거운 일임을 절감하며, 그는 비로소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에게 기대서 새우잠을 자던 그녀가 부스스 눈을 떴다. 낭군이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이 웃자 비로소 그녀는 안심이 됐다.
“언제 깨었어요? 몸은 괜찮아요?”
“괜찮아, 걱정하지 마.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 편하게 눈 좀 붙여.”
“다 잤어요. 아침 준비를 할게요.”
“자상을 당했을 때 필요할 것 같아서 계관화꽃을 말려 놓은 게 있는데 번거롭더라도 그것 좀 달여서 줘. 참숯가루도 곱게 빻아서 주고.”
“알았어요.”
천동은 아침을 먹고 부인이 달여 준 계관화(맨드라미) 물을 마셨다. 그런 후에 붕대를 풀고 상처 부위에 곱게 간 오징어 뼈와 참숯가루를 뿌렸다. 여기까지가 천동이 알고 있는 치료방법의 전부였다. 전란 중에 의원을 찾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조치를 한 셈이다.
옥화는 어릴 때 친정어머니가 열을 내리는 데 사용했던 뱀딸기를 생각해 내곤, 산 중턱까지 내려가서 채취해 왔다. 지아비가 알면 위험하다고 말릴 것 같아서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하고는 몰래 다녀온 것이다. 상처 부위의 통증으로 그이가 이마를 찌푸릴 때마다 미리 달여 놓은 그것을 조금씩 마시게 했다. 열흘을 그렇게 정성껏 간호를 한 덕분에 그의 상처도 대부분 아물고 통증도 사라졌다.
다음 날 새벽에 천동은 맨손으로 동해의 해돋이를 지켜보았다. 아직 검술 수련은 그에게 무리지만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언제 보아도 장엄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일출 앞에서 그는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천한 신분에 맞지 않게 그동안 높은 분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우쭐해 있었던 모습을 생각해 내고는 반성했다. 그분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었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면천은 되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자신은 여전히 허울뿐인 양반이었다.
양반 출신 의병장 이눌 장군이 자신을 장군이라고 불러줬다고 해서 자신이 정말로 장군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 모든 게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 현재 자신의 신분을 직시하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미래와 부인인 옥화 그리고 장차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들을 말끔하게 걷어낼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글 : 지선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