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집인가?”
산행 중인 남편이 보내온 사진을 넘겨보던 중, 곁에 있던 딸아이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앙상한 나뭇가지 꼭대기에 새의 둥지처럼 매달린 겨우살이가 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둥근 초록이 제법 선명했다.
오래전 남편이 암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일 때 멀리 있던 지인이 겨우살이를 보내왔다. 항암에 좋다는 말보다 위로가 먼저 읽혔다. 병원에서는 처방한 약 외에는 삼가라 당부했기에 남편 대신 내가 먹었다. 우리 가족이 시린 계절을 통과하는 데는 그가 전한 마음도 보탬이 되었다.
겨우살이는 반기생식물이다. 남의 몸을 빌려 사는 삶이 오죽할까 싶지만, 생존 방식은 생각보다 치열하고 대담하다. 뿌리가 없는 대신 흡기(吸器)를 나무에 연결해 수분과 무기양분을 얻는다. 그렇다고 염치없이 모든 것을 의존하지는 않는다. 엽록체를 지니고 있어 광합성으로 탄수화물을 생산한다. 잎이 떨어진 겨울 산에서 혼자 초록인 이유도 그 덕분이다. 완전히 의존적이지도, 완전히 독립적이지도 않은 존재라고나 할까.
겨울을 사는 것인지, 겨우 사는 것인지. 궁색한 처지가 읽힐 때도 있지만, 이름은 때로 고난을 넘어선 생명력의 증거가 된다. 부평초, 질경이, 인동초처럼. 켈트족 신화에서 겨우살이가 생명과 공동체를 보호하던 식물로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겨울은 준비하는 시간이다. 식물은 다가올 계절을 위해 제 몸의 수분을 비우고 세포의 농도를 높여 영하의 기온을 견딘다. 시련 속에서 봄을 밀어 올릴 동력을 완성한다. 남편은 긴 겨울을 보내고 다시 왕성하게 일어섰다. 그가 겨울을 산 것인지 겨우 산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타인의 어깨를 빌리기도 하고, 자신을 다독이기도 하며 통과했으니.
딸아이가 화면을 확대해 겨우살이를 자세히 본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더니 전화기를 넘겨준다. 싱그러운 초여름처럼 보이는 저 아이에게도 언젠가는 겨울 같은 시간이 오겠지. 그때 스스로 빛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기를,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기를 마음으로 기도한다.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