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단테의 <신곡>은 서구 지성사의 이정표와 같다. 단테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사후 세계를 탐험하며 구원과 심판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천당과 연옥, 지옥으로 나눠 묘사했는데,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곳은 단연 ‘지옥편’이다.
단테가 묘사한 지옥은 깔때기 모양으로 아래로 갈수록 죄의 무게가 무거워지며 형벌 또한 참혹해진다. 우리는 흔히 살인이 가장 큰 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단테의 기준은 다르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 제9옥에 갇힌 이들은 바로 ‘배신자’들이다. 뜨거운 불길이 아닌 차디찬 얼음 속에 갇혀 영원히 고통받는 그들을 통해, 단테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추악한 악의 형태가 바로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임을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단테의 경고가 여전히 유효함을 깨닫게 된다. 뉴스를 장식하는 사기 사건부터, 정치권에서 난무하는 변절 행위, 그리고 직장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심까지 배신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회에서의 배신은 단순히 개인 간의 약속을 어기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 간의 ‘기본 신뢰’를 무너뜨리며,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높은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한다. 서로를 의심하며 감시하는 사회는 역동성을 잃고 고립될 뿐이다. 배신은 결국 공동체의 근간을 갉아먹는 독소다.
배신을 잘 하는 이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어 기제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논리이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은 유동한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며 변화가 우주의 본질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 철학적인 통찰은 배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면죄부가 아니다. 그가 말한 변화는 자연의 순리를 설명하는 것이지, 인간 사이의 도덕적인 약속을 상황에 따라 버려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진정한 변화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지, 어제의 약속을 부정하는 비겁함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이익이나 욕심과 관련된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관계를 저버린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치 않는 가치를 지켜내려는 의지, 그것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존엄성이라 할 것이다. 우리는 ‘유연함’이라는 미명 하에 변심을 너무 쉽게 용납하곤 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곧 ‘변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변화무쌍한 소용돌이 속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변치 않음’의 미덕이 더 빛을 발한다.
공자는 일찍이 <논어>에서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그 어디에도 쓰일 곳이 없다’고 강조했다. 수레의 바퀴를 잇는 쐐기가 없으면 수레가 굴러갈 수 없듯, 사람 사이의 신의는 사회라는 수레를 움직이는 핵심이다. 또한, 영국의 작가 새뮤얼 존슨은 “신뢰는 모든 덕의 기초이며, 신뢰가 없는 곳에는 우정도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혹은 더 큰 이익이 생겼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것은 성숙한 인간의 태도가 아니다.
인생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완성된다. 우리가 삶의 끝에서 되돌아볼 때 가장 소중하게 기억될 것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나를 믿어준 사람들과 내가 끝까지 지켜낸 신의의 기록들이다. 단테가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배신자들을 배치한 이유는, ‘신의’야말로 인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배신이 능력으로 포장되고 신의가 어리석음으로 치부되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이제 우리는 다시 ‘신의’라는 오래된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 내가 먼저, 누군가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 비바람이 불어도 그 자리에 서 있는 든든한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신의를 지키고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사회, 그런 따뜻한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이기원 전 울산시 기획관리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