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15일 재일동포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등은 총결집하여 전국 규모의 민족운동 조직을 결성했다.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 이하 조련)이 그것이다. 이후 같은 해 11월 조련의 오사카(大阪) 니시나리(西成) 지부는 결성되자마자 텐가차야(天下茶屋) 일대의 당시 호황을 누리고 있던 재일동포 비누 제조 및 판매업자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집하여, 이듬해인 1946년 현지 소학교 2곳을 빌려 서당식 학교로 민족교육을 시작한다. 이것이 오늘날 오사카의 학교법인 금강학원 OKIS(오사카금강인터내셔널소·중·고등학교)의 모체다. 교조련은 결성과 함께 박열(朴烈 1902.2.3~1974.1.17)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석방된 박열은 조련에서 이탈하여, 1년 후인 1946년 10월 3일 조련에 반대하는 새로운 조직인 재일본조선거류민단(1948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개칭, 1994년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개칭 오늘에 이름)의 초대 단장으로 취임한다. 이러한 영향은 오사카 니시나리구에도 미쳐 1947년 9월25일 구내의 고지(弘治)소학교 강당에서 조련 니시나리 지부와 별개로 민단 니시나리 지부가 결성된다.
금강학원 창립 40주년 기념지에 따르면 같은 해 10월, 민단 내에 학교 설립 기성회를 결성하고 건축허가 신청, 모금 개시, 12월에는 학교 용지를 매수한다. 1948년 2월부터 교사 건축 공사를 시작하여, 3월에는 목조 기와 1층 건물의 교사 2동(교실 7실, 직원실 1실, 숙직실)이 준공된다.
이후 해방 직후 조련이 민족운동 조직을 결성하던 초기와 같이, 정치적으로 좌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엄정한 중립 교육을 한다는 타협과 함께 마쓰미야(松宮)소학교의 제1교와 센본(千本)소학교의 제2교의 학생과 교사 전원이 1948년 4월 신학기부터 민단 니시나리 지부가 신축한 교사에서 수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정식으로 니시나리조선인소학교가 출발한다.
그런데, 1948년 1월24일 일본 문부성 학교교육국장은 ‘조선인 학교 설립 취급에 대하여’라는 통달을 내리고, 3월부터 순차적으로 조선인 학교를 폐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당한 과정은 오사카와 고베(神戶)에서 재일동포들의 한신(阪神)교육투쟁이라는 민족교육 운동으로 이어졌지만, 1949년 10월 30일 조선인학교 폐쇄령에 따라 니시나리조선인소학교는 물론 전국의 민족학교가 대부분 폐쇄당하고 많은 동포 자녀는 일본 학교로 편입하거나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니시나리조선인소학교의 초대 교장 빈상근(賓相根)이 일신상의 이유로 1949년 2월 사임한다. 그리고 4월25일, 조련계 교사들이 조련 산하 청년들과 함께 학내 국기 게양대에 북한의 인민공화국기(이하 인공기)를 게양하고 학교 점거를 선언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학교와 민단 단원들이 수 시간 후에 바로 인공기를 내리고 사태를 수습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교는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각 교실과 직원실에도 태극기 액자를 걸며 대한민국 문교시책을 준수하는 교육을 선언하게 된다. 이렇게 좌우 합작의 교육의 자주성을 기반으로 한 니시나리조선인학교는 조련의 인공기 게양 사건으로 1949년 이후 재일 한국학교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게 된다. 현재 같은 오사카 스미노에구(住之江)에 있는 남(南)오사카조선초급학교도 1949년 조선인학교 폐쇄령 이전의 마쓰미야 제1교와 센본 제2교 그리고 니시나리조선인소학교까지를 그들의 학교 연혁에 담고 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이어지는 분단의 흔적이다.
이 일련의 과정 가운데 니시나리조선인학교 2대 교장으로 취임한 김영대(金永大)는 같은 해 10월 조선인학교 폐쇄령에 따라 폐쇄된 학교를 다시 개교시키기 위해 민단 니시나리 지부와 함께 재단법인 인가를 신청하게 되고, 1950년 3월14일자로 문부성에서 정식 인가를 받는다. 즉, 학력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일본의 정규사립학교로 인가받는다. 이에 3월30일 긴급이사회와 학부형회를 소집하여 재단법인 금강학원이 정식으로 인가된 것을 보고하고, 학교명도 니시나리조선인소학교에서 금강학원 금강소학교로 개칭할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 무렵 금강학원의 재정은 극도로 빈곤한 상태로, 동포들의 비누 사업 역시 대불황을 겪으며 도산과 폐업이 속출하였다. 이후 무급 교장은 물론 3년간 교장이 공석인 채로 교감의 직무대행이 이어진 때도 있었다. 물론 그사이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1954년 중학교(각종학교)를 병설하는 등 큰 노력을 하였지만, 학생 수는 많이 늘지 않았다.
그렇게 민단 주도의 학교 운영이 완전히 막히고 난항을 거듭하던 중, 1957년 6월24일 주일대표부 오사카사무소에서 대책위원회를 열어 협의한 결과, 사카모토(阪本)방적 서갑호(徐甲虎)를 새 이사장으로 추천하게 된다. 신임 이사장 취임을 요청받은 서갑호는 한국교육위원회 등을 발족하며 동포 자녀 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인 오사카 민단 본부 장익화(張益和) 전 단장(4대 1951.7~1952.5, 7대 1955.9~1956.5)을 교장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취임을 승낙했다.
이렇게 해서 금강학원의 제2대 이사장으로 1957년 7월27일 서갑호는 취임하게 된다. 이사장으로 취임하며 학원의 운영에 필요한 경비 부족 문제를 본인이 전부 해결하겠다는 결의를 밝혔고 약속은 그날로 즉시 이행되었다.
정희영 서울대 교육종합연구원 책임연구원 교육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