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화전민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만 12살 때 경기 성남으로 이주, 영세공장에서 소년공 생활을 했다. 시계공장에서는 스프레이 작업을 하다가 후각이 상했고,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는 프레스에 왼팔이 끼이는 골절상을 당해 팔이 구부러진 평생 장애를 안게 됐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주경야독’으로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한 뒤 장학금을 받고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고, 1986년 사법고시(연수원 18기)에 합격했다.
지난 2017년 대선 당시 “변방의 벼룩이 소를 잡겠다”며 대권에 도전, 당내 경선에서 ‘의미 있는 3등’으로 훗날을 기약했던 그는 그 사이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체급을 키웠다. 정치권에서 ‘전투형 노무현’이라는 평가를 만들어낸 특유의 ‘사이다’ 직설 화법과 승부사적 기질이 ‘변방의 장수’ 이재명을 키워낸 자양분이었다.
국회의원 경험이 없는 ‘0선’ 비주류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컸지만, 무상 교복과 기본소득 등 논쟁적인 정책 과제를 성과로 바꿔내는 뚝심을 지켜온 마침내 정권 재창출의 선봉장으로 발돋움했다.
이 후보에게 있어 대학 시절 비로소 알게 된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이 정치 입문 결심의 계기 중 하나였다. 그는 “5·18은 개인적 영달을 위해 살아갔던 저를 공평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살도록 바꿨다” “저를 사회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 건 5월 광주로, 광주는 제 사회적 어머니”라고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사법연수원 시절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의를 들은 것이 노동 인권변호사의 길을 선택하는 계기가 됐다고 이 후보는 회고했다. 김두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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