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선진교육 받은 언양 부잣집 장남, 지역내 빨치산 척결 앞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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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선진교육 받은 언양 부잣집 장남, 지역내 빨치산 척결 앞장서
  • 홍영진 기자
  • 승인 2022.04.1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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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직후 언양에서 빨치산 척결에 앞장섰던 박영찬은 ‘언양의 대궐’로 불릴 정도로 큰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 집은 그가 살았던 때 이미 남의 손으로 넘어가 지금은 불고기를 파는 음식점이 되어 있다.

해방 후 빨치산 신석구가 양민을 괴롭히고 있을 때 빨치산 검거에 앞장섰던 인물이 언양에 있었다. 그가 당시 민족청년단장을 지냈던 박영찬이었다. 학교로 보면 둘은 언양초등학교 동창으로 박씨가 12회로 선배가 된다.

1915년 언양읍 서부리에서 출생한 박씨는 해방 후 각종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하는데 이런 이면에는 부친 박현진의 후광이 컸다.

박현진은 일제강점기 언양 부자로 선행을 많이 했다. 동아일보는 1933년 여름 울산지역 일대에 큰 홍수로 집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때 박씨가 이들을 위해 구호품과 성금을 많이 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기사가 난 4년 뒤인 1937년 7월25일에는 동아일보가 ‘울산소개판’을 만들었는데 여기서도 ‘실업계 중진 언양 박현진’이라는 제목으로 박씨가 양조장 경영으로 번 돈을 지역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다고 칭송하고 있다.

박씨는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장남 영찬을 중학 시절 서울로 보내 보성중·고를 졸업시켰고 대학은 일본에 유학까지 보내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부자들 중에는 일본을 ‘상놈의 나라’로 보고 자식들이 일본에서 공부하는 것을 꺼린 부자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부자 자녀들은 공부 대신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한량으로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잦았다.

영찬은 일본 명치대 법학부를 졸업했는데 이런 화려한 학력이 해방 후 각종 사회 활동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가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시끄러웠을 때, 영찬은 양산 출신의 신달수와 함께 서울까지 가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신씨는 나중에 언양과 부산을 오가는 경남여객을 운영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신씨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할 때 당시 고려대 학생으로 신탁통치 반대에 앞장섰던 이철승씨와 인연을 맺었고, 나중에 12대 총선 때는 이씨의 도움으로 신한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자유당 시절 영찬은 민족청년단 일원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해방 후 빨치산 준동으로 치안이 어지러워지자 자유당 정부의 이범석은 국내 치안의 안정을 꾀하고 특히 빨치산을 돕는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1946년 민족청년단을 조직한 후 이 세력을 지방까지 확대했다.

우익을 표명해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던 이 조직은 빨치산과 부역자를 척결하면서 무소불위의 막강 권력을 갖게 되는데 언양에서는 이 단체의 장을 박영찬이 맡았다.

해방 후 언양은 신불산에 남도부 부대가 주둔하면서 식량과 의류 등을 구하기 위해 빨치산이 자주 마을로 내려와 주민들을 괴롭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박 단장의 권한이 커졌다. 이처럼 민족청년단의 활동이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는 빨치산 척결에 중점을 두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민족청년단을 ‘반공청년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6·25 당시 민족청년단 사무실은 옛 언양지서 자리에 있었다. 6·25가 일어나면서 빨치산이 자주 산에서 내려와 지서를 습격하자 언양 지서는 당초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겨 옛 지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일제시대 건립되었던 옛 지서에는 죄인들을 남녀 구분해 수감하기 위해 감방이 두 개 있었는데 민족청년단은 이 두 개 감방에 부역자들을 수감시켜 놓고 조사를 벌였다.

박씨는 빨치산을 색출했지만 무고한 주민들이 부역자로 몰려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그는 특히 언양에서 억울하게 부역자로 몰려 나중에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많이 구했다.

빨치산은 식량과 의류 등 보급 투쟁을 나오면 그들이 탈취한 보급품을 반드시 집주인이 일정한 장소까지 옮기도록 했다. 이것은 우선 그들이 돌아간 후 집주인이 지서에 신고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빨치산 보급품을 옮겨주면 이 자체가 부역이 되어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집주인이 빨치산이 보급품을 탈취해 가도 이 사실을 지서에 알리지 못했다.

6·25 전 정부는 보도연맹을 결성하면서 처음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거나 이들을 도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6·25가 급작스럽게 터지자 정부는 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공산주의자들과 내통할 수 있다면서 학살했다. 울산도 마찬가지로 6·25가 일어나자 무고한 주민들이 강압에 의해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거나 죽었다.

이때 민족청년단장으로 보도연맹 가입자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박씨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사실만으로 억울하게 죽을 뻔했던 주민들을 구했다. 예로, 당시 언양읍성 인근에 살았던 변삼선도 마을 사람들이 빨치산을 도왔다는 오해를 해 부역자로 몰려 죽을뻔 했는데 이를 안 박씨가 구해주었다. 이후 이를 고맙게 여겼던 변씨 부인 심경초 여사는 명절이면 항상 박씨 집을 찾아가 술과 고기를 박씨에게 대접하면서 고마워했다고 한다. 인심이 후하고 주위 사람들을 많이 도와 ‘언양 엄마’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심씨는 지난해 101살로 타계 했는데 울주군의회 의장을 지냈던 변양섭이 그의 장남이다.

이외에도 언양 남부리에서 약국을 운영했던 P씨도 “박영찬 단장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가 6·25 무렵 부역자로 몰려 죽었을 것”이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이런 선행에도 불구하고 박씨는 1950년 제2대 총선에 출마해 낙선했다. 선거에는 떨어졌지만 그가 주민들로부터 얼마나 신망을 받았나 하는 것은 4·19 후에도 그가 선출직에 당선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자유당 시절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들 대부분이 4·19 후 수감되거나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박씨는 계속 언양에 머물면서 5·16 후 재건국민회의 본부장을 역임했고 1972년 제1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런 영광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후는 편치 못했다. 선거에 자주 출마하다 보니 재산을 많이 날렸다. 그의 부인은 인심이 후하고 음식 솜씨가 좋기로 언양에서 소문이 났을 정도다. 따라서 그는 공직으로 바쁜 생활을 할 때도 식사는 항상 자신의 집에서 부인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부 사이에 아들이 없어 고심했던 그는 나중에 소실을 얻어 따로 살림을 차렸는데 이때는 언양을 떠나 울산 도심에서 잠시 살았다. 울산에서 아들 한 명을 얻었지만 살림이 궁해지자 그는 다시 언양으로 돌아왔다.

이때는 한때 ‘언양의 대궐’이라고 불리었던 그의 집이 남의 손으로 넘어가 옛집에서 조금 떨어진 남부리 안효식병원 자리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언양에서 제일 큰 기와집이었던 그의 집은 부친 현진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타계 후 반곡에 묻혔는데 장례식 때는 그의 유언에 따라 조의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풍상을 겪었지만 그가 살았던 언양 옛집은 옛 모습 그대로다. 언양초등학교 사거리 북서쪽에 큰 기와집이 있는데 이 집이 그의 옛집이다. 현재 이 집은 불고기를 판매하고 있지만 지금도 고래등처럼 큰 기와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집은 현재 남문과 동문 등 두 개의 문이 있는데 이들 문은 옛날에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넓지 않았다. 문이 넓혀진 것은 불고기집이 되면서다. 남문으로 들어서면 북쪽에 큰 우물을 낀 안채가 있고 서쪽에 사랑채가 보인다. 안채는 잠겨 있고 장사는 사랑채에서만 하고 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집 앞에 있었던 옛 혜성다방 자리다. 박씨가 자주 드나들었던 혜성다방 자리에는 현재 치킨집이 들어서 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그의 흔적은 작괘천에도 있다. 작괘천 공중화장실에서 작천정으로 들어가면 왼편 바위에 ‘朴鉉鎭 子 泳讚’이 새겨진 석각이 있다. ‘영찬’이 ‘자’로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글은 부친 현진 때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문중에는 박씨 외에도 유명인이 많다. 일제강점기 7대 언양 면장을 지냈던 박영환이 사촌이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 언양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던 박기동이 5촌 조카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안효식병원의 안병원장은 일제강점기 경남도평의원으로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부르짖는 등 누구보다 항일운동을 열심히 벌였다. 그러나 그 역시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다가 경찰의 소환을 앞두고 스스로 여관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 좌익 척결에 앞장섰던 박씨가 마지막 숨을 좌익운동가 집에서 거두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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