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사료적 가치 높은 이근오(竹塢·죽오)의 문집 등 풍파 겪으며 자취 감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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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사료적 가치 높은 이근오(竹塢·죽오)의 문집 등 풍파 겪으며 자취 감춰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7.0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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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 동뫼 아래 있었던 죽오 집에는 당시 과거제도와 울산 풍물을 보여주는 <죽오문집> 등 귀중한 책자가 많았지만 이들이 사라져 아쉬움을 주고 있다. 죽오 집이 사라진 동뫼에 지금은 울산공단으로 들어가는 전류가 흐르는 철탑만 서있다.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은 한창 시대 3000~4000석 했다.

이들 논밭이 사라진 때가 해방 직후 자유당 정부에서 농지개혁을 했을 때였다. 그러나 ‘부자 망해도 3년 간다’고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은 논밭이 많아 6~7명의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었다.

이후 세상이 바뀌면서 전답도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전답만이 아니었다. 4000여 평이 넘는 집터도 소유주가 바뀌어 지금은 울산시가 관리하고 있다.

사라진 것이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근오(覲吾)와 석진(錫瑨)이 장원급제 했을 때 임금으로부터 받았던 어사화(御賜花)도 오랫동안 보관되어 오다가 사라졌다. 어사화는 과거에 급제하면 합격증서인 홍패와 함께 받는데 급제자는 복두 위에 어사화를 꽂아 활대처럼 휘어 드리우고 다녔다.

장원급제하면 궁궐에서 임금에게 절을 올리고 대신들을 만나고, 궁궐을 나온 후에는 광대들이 흥을 돋우는 가운데 시가지를 돌면서 축하받았다. 죽오와 석진처럼 고향이 지방일 경우 고향에서도 현감을 만나고 고을을 돌면서 축하받았는데 이때도 어사화를 복두 위에 걸쳤다.

사라진 가보(家寶) 중 학성이씨 문중에서 어사화 보다 아까워하는 것이 <죽오문집>(竹塢文集)이다. 평생 학문을 연마했던 죽오(竹塢) 이근오(李覲吾)는 많은 책을 남겼다. 이중 <죽오문집>은 당시 과거제도와 울산의 풍물이 많이 기술돼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장원급제는 못했지만 생원과에 입격했던 죽오의 손자 장찬(璋燦)도 귀중한 책들이 많았다. 이들 유품은 죽오와 장찬이 타계한 후에도 후손들이 오랫동안 보관해 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죽오의 5대손인 일수와 갑수 형제가 만주로 갔다. 그때만 해도 죽오 후손들은 살림이 넉넉해 이들 형제가 왜 만주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들이 가옥과 전답은 물론이고 많은 책도 처분하지 않고 만주로 간 것을 보면 해방이 되면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해방은 그들이 기다렸던 것처럼 일찍 오지 않았다.

더욱이 해방과 함께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서면서 서로 오갈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이러는 사이 1970년대 죽오 고손녀와 그의 아들 김경섭이 석천리로 와 죽오 집에 있던 문집과 살림을 모두 가지고 갔다. 당시 죽오 집은 근재공 고택 앞 오늘날 철탑이 있는 동뫼 바로 아래 있었는데 일수와 갑수가 만주로 간 후 이 집이 계속 비어 있었다.

일수와 갑수는 만주로 떠났지만 23칸이나 되는 이 집에는 서재가 따로 있을 정도로 책이 많았다. 해방 후 주인 없는 이 집은 이 마을에 사는 죽오의 먼 인척인 이동천씨가 관리했다.

고손녀는 당시 경주 불국사 아래 신계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들이 죽오의 서책과 살림 도구를 가져갈 때만 해도 경제적으로 넉넉해 큰 한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고손녀의 손자 대(代)에 이르러 집안이 어렵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죽오문집> 일부가 부산 고서점에서 거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무렵 <죽오문집> 일부가 동국대학교 경주 분교에 넘어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전시가 되는 것도 확인됐다.

이런 소문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이 학성이씨 이병직 어른이었다. 과거 울산교육장을 역임했던 이 옹은 심완구 울산시장과 함께 부산 고서점을 찾아갔다. 문집은 부산시청에서 가까운 고서점 술고당에 있었다. 이 무렵 울산시는 광역시 승격을 앞두고 울산박물관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심 시장은 <죽오문집>을 사들여 박물관에 전시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심 시장이 이 옹과 함께 술고당에 가보니 <죽오문집>은 다른 유품과 함께 5개의 라면박스에 잘 보관돼 있었다.

둘은 유품을 구경한 후 이를 구입하겠다는 뜻을 비치면서 흥정해 보았다. 그러나 주인 손씨가 예상외로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해 흥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손씨는 당시 라면박스 5개 분량의 각종 서책을 8000여만원은 받아야 팔겠다고 고집했다.

손씨가 이처럼 많은 돈을 요구하자 심 시장은 이 돈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할 것 같아 의회 관계자와 협의해 보았다. 그런데 의회 관계자가 이처럼 많은 돈을 울산시 예산으로만 구입하는 것이 힘들다는 의견을 내어놓아 구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이 옹은 문중 사람들과 함께 2~3번 더 술고당을 방문해 손씨와 흥정해 보았으나 가격이 맞지 않아 매매가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이 옹과 함께 술고당을 찾았던 이수원 울주문화원 부원장은 “제가 이 옹과 함께 술고당을 찾았을 때 <죽오문집> 등 사료적 가치가 높은 책이 이미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출판되는 등 <죽오문집>에 대한 학계의 이목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우리 문중에서 <죽오문집>을 구입하려고 노력했지만, 문중이 당장 큰돈을 마련하는 것이 힘들어 이들을 구입하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아쉽습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부원장은 자신이 술고당을 찾았을 때만 해도 술고당에는 <죽오문집> 외에도 길이가 3.2m, 폭이 30㎝가 되는 <학파실기> 두루마리와 죽오가 생전에 사용했던 인장과 노비문서 등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품이 많았다고 회상한다. <죽오일기>는 이후 경북대학교 출판부가 2010년 국역 출판했다.

학성이씨 문중에서 이처럼 <죽오문집> 구입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일제강점기 만주로 갔던 갑수의 부인 남필규 여사가 울산 땅을 찾았다. 그가 울산에 온 것은 남편 갑수가 만주로 가면서 남겨 둔 재산을 찾기 위해서였다. 갑수는 만주로 갈 때 아마 결혼 하지 않고 가 연변에서 남 여사와 결혼했던 모양이다.

갑수는 타계할 때 부인 남 여사에게 “내가 이곳으로 올 때 급하게 오느라고 처분하지 못하고 남겨두고 온 전답이 아직 고향 땅 울산에 많이 있으니 내가 죽은 후 이것을 팔아 고향에서 편히 살라”고 당부했다. 남 여사는 갑수 사이에 딸 둘을 두었는데 그가 울산으로 올 때 이들 딸이 모두 출가해 만주에서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남 여사가 딸은 만주에 두고 재산을 찾기 위해 울산으로 온 때가 한중 관계가 좋아졌던 199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남 여사가 울산에 왔을 때는 이미 농지개혁에 따라 남편 갑수 소유의 전답은 물론이고, 심지어 집까지도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따라서 남씨는 1평의 땅도 찾지 못한 채 당장 숙식을 해결할 길이 없어 석계서원에 있었던 경수당에서 혼자 외로이 살아야 했다. 남 여사가 머물 때만 해도 경수당은 전기는 물론이고 상수도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일상생활에 불편이 컸다. 더욱이 천장이 비가 새 오래 머물 수가 없는 지경이 됐다. 그러나 그는 이런 어려움 속에도 만주로 돌아가지 않고 석계서원 가까이 사는 학성이씨 문중의 도움으로 경수당에서 1~2년 정도 지냈다.

당시 남 여사의 삶을 지켜보았던 문중 사람들은 남 여사가 경제적으로는 힘들게 살았지만 매사 양반집 며느리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한시를 잘 써 경수당에 머무는 동안 잡기장에 많은 한시를 써놓고 석계서원을 찾는 문중 사람들에게 보이곤 했다고 한다.

남 여사의 이런 불편한 생활을 알고 새집을 얻어주었던 인물이 김석암 울주문화원 감사였다. 김 감사는 이 무렵 마침 웅촌면사무소 인근 동생 집이 비어 있어 남 여사를 이곳으로 이사시켰다.

그리고 웅촌면사무소에 얘기해 남 여사를 돕도록 했다. 웅촌면사무소는 도우미를 보내어 남 여사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일상도 도왔다.

이 무렵 어머니가 한국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만주의 딸들이 울산에 와 가끔 남 여사를 만난 후 돌아가곤 했다. 딸들은 당시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연변으로 가자고 권했으나 남 여사는 남편 고향에 뼈를 묻겠다면서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는 웅촌면사무소에 주민등록까지 해 기초연금을 받아가면서 한동안 살았다.

당시 남 여사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김석암 감사의 얘기다.

“남 여사는 중국어와 우리 말은 물론이고 일어까지 잘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았지만, 성격이 깔끔해 경로당에서 할 일 없이 노는 것을 싫어해 경로당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시를 쓰면서 주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런 남 여사가 만주로 간 것은 딸들은 물론이고 사위까지 울산으로 와 만주로 갈 것을 간곡히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남 여사는 떠날 때 자신이 울산에 머무는 동안 집필했던 잡기장 형식의 시집을 김 감사에게 주고 갔다. 김 감사는 “남 여사의 성정을 생각할 때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요즘은 그때보다 우리나라와 만주로 오가는 길이 훨씬 쉬워져 기별이라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그가 울산을 떠난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돌아갔을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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