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울산과 인근지역 배경으로 특유의 토착적 문학세계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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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울산과 인근지역 배경으로 특유의 토착적 문학세계 구축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7.2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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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용 작가가 이징옥 난을 배경으로 <대평원의 황제>를 쓴 것은 이징옥이 양산 출신으로 그와 관련된 얘기들이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양산 하북면 삼수리에는 이징옥 3형제를 기리는 삼장수 비석이 있다.

김수용의 대표작을 들라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청맹과니들의 노래>를 말한다. 1985년 1000만원 고료 소설문학상 당선작이었던 이 소설은 청소년 시절 그가 경험했던 거지 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학교 교사인 주인공 김수구가 거지 왕초 최 형을 통해 본 1980년대 밑바닥 인생을 그렸다. 김수구는 고등학교 시화전 때 만난 최 형과의 인연으로 거지생활을 경험한다. 최 형은 정체가 불분명한 인물이다. 경상도 부잣집 아들이라는 소문도 있고 일간지 신춘문예 출신의 작가라는 풍문도 들린다. 김수구는 한때 최 형의 기행에 매료된다.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까맣게 잊고 있던 최 형의 전보를 받고 안동으로 올라간다. 최 형과 해후한 김수구는 그와 낯선 동행을 한다.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실제로 울산에 오기 전 그는 거지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이에 대해 그는 “거지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들의 아웃사이드 생활이 흥미가 있었고 또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낭만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작품 <청맹과니들의 노래>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당선과 상금을 노리고 글을 쓰다 보니 곳곳에서 드러나는 치기와 설익은 부분이 많아 늘 마음에 걸렸다고 실토했다.

1988년 출간했던 <공단동 128번지>는 당시만 해도 아직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지 않았던 울산의 공해 문제를 소설화 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김사인 문학평론가는 이 소설을 평하면서 “김수용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서구적 의미의 개념과 구별되는 우리 문학의 토착적인 미학원리인 ‘입담’의 전통과 다시 만난다. 구어체적 재미와 감칠맛을 주는 그의 입담은 작가의 풍부한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고 평했다.

<이화에 월백하거든>도 장편소설로 온산공단의 공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추리소설 기법으로 쓴 이 소설은 공해가 현재 피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대평원의 황제>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양산 출신의 이징옥 일대기로 이 책을 쓴 동기는 서문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서문에서 ‘역사는 결코 개인의 것일 수 없고 창작된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왜곡되고 객관성이 결여되었다고 인정되는 사실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바로 잡아야 한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이 책에서 김종서가 개척한 6진을 이징옥이 개척했다고 기술해 놓아 김씨 문중의 비난을 받았다.

이 작품을 쓸 때는 이징옥의 출생지인 양산으로 직접 가 당시 양산 토박이로 지역 향토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토곡요의 이경효 사기장과 함께 이징옥의 생가 등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소재를 찾았다. 한동안 그는 토곡요에 머물면서 글을 썼다.

김수용은 <대평원의 황제>를 쓸 무렵에는 작가로서 명성이 중앙에도 알려졌다. 따라서 중앙 작가와 교류도 잦아 <머나먼 송파강>의 작가 박영한과 신동아 논픽션 당선 후 소설가가 된 조동수를 울산으로 초빙해 울산 문인들과 교류를 갖도록 했다.

이처럼 작가로서 명성이 높아지자 서상연 시인은 당시 그가 운영하고 있던 처용출판사를 김 작가에게 넘겼는데 천성적으로 돈을 몰랐던 그는 출판사 운영에 성공하지 못했다.

작가로 명성이 높아지자 1991년에는 <한국문학>이 그에 대한 특집을 싣고 그의 작품세계를 분석했다.

<한국문학>은 그의 작품이 허리 부분이 약하고 마무리 역시 쫓기듯 말끔히 정리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을 했다.

이에 대해 김 작가는 “내 주위에는 항상 죽음의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40대에 죽을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갖고 작품을 대하다 보니 문장 중에는 가끔 말끔히 정리하지 못한 글이 있다”고 답했다.

그가 40세의 나이가 넘어서면서 가끔 기이한 행동을 보인 것은 이런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긴 수명을 살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런 강박관념과는 달리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살다가 죽었다.

작가로서 그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 때가 1990년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때까지 그가 발간한 작품집이 11권이나 되었고 그의 말대로 당시 그는 먹고살기 위해 매일 50장의 원고를 썼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가 이처럼 왕성한 문필활동을 할 무렵인 1995년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이후 경주 복원사로 들어가 한동안 세상과는 소식을 끊었다.

그는 자식 교육도 특별해 자녀들이 초등학생일 때 담임선생을 찾아가 “우리 애는 공부를 못해도 괜찮으니 억지로 공부를 시키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사고는 중학교 영어 선생이었던 장모씨가 운전을 하다가 일어났다. 장모 선생은 이 사고로 옥살이까지 했다.

옥살이하는 동안 성경을 가까이했던 장모씨는 출옥 후 깊은 신앙심으로 울산의 큰 교회 장로까지 되었다. 이후 그는 성시(聖詩) 시인이 되었고 신자들에게 매일을 통해 매일 성시를 보내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상북의 외곽지역에 별장을 지어놓고 이곳에서 살았다.

김 작가는 그해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도의원 후보로도 출마해 당시 성신고등학교 앞 2층 건물에 선거 사무실을 차려놓고 선거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투표일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갑자기 2층 선거사무실에서 뛰어내리는 바람에 입원까지 했고 이런 기이한 행동이 전국 뉴스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이때 뛰어내렸던 이유로 돈 선거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후에도 그의 기행은 계속되어 어느 여름날 선바위에서 기우제가 열렸을 때는 짧은 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지팡이를 어깨 위에 걸치고 나타나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이후 울산의 지인들로부터 적지 않은 돈을 마련했던 그는 이 돈으로 경기도에 절을 지은 후 수양 겸 좋은 작품을 쓰겠다면서 떠났으나 절도 짓지 못하고 이 돈을 떼이고 말았다.

다시 울산으로 온 그는 울산의사들의 회고록을 쓰겠다면서 작가로서의 의욕을 보였지만 오랫동안 앓아왔던 척추와 신경계통 지병으로 요양병원에 입원한 후 3년 동안 요양하다가 타계했다.

박종해 시인은 김 작가에 대해 “<청맹과니들의 노래>와 <불매> 등을 발표할 때만 해도 울산에서 소설가로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면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그가 재능을 끝까지 발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 <쫄병전선>은 그의 사후 8년이 지난 뒤 울산 문인들이 무대에 올려 관중들에게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한 때 자신의 작가생활에 대해 ‘만일 내게 글 쓰는 재주조차 없었다면 무슨 입으로 나도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라는 이 건방스럽기 짝이 없는 말을 이제는 이렇게 고쳐야겠다. ‘만약 나에게 세상을 혹은 독자를 속일 마음이 생긴다면 바로 그 순간에 붓을 던지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작가 초기만 해도 그는 울산을 배경으로 글을 쓰다 보니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 얘기와 당시 다른 지역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공해 문제가 많이 소재가 되었다.

그때 이미 김 작가는 앞으로 공해 문제가 우리 사회에 끼칠 해악을 깨닫고 경제성장이 행복의 성장이 될 수 없다고 설파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문을 썼던 한 중진 작가는 김수용 작품에 대해 “김 작가가 초기 작품을 이것저것 너무 많이 쓰다 보니 잡화상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지만 언젠가는 우리 영혼의 온전하고 완전한 자유를 위해 부싯돌을 들 날도 있을 것이다”고 예견했으나 그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는 바람에 이런 우리들의 기대를 채우지 못했던 것 같다.

김 작가가 <대평원의 황제>를 썼던 것은 이 작품의 주인공 이징옥이 울산에서 가까운 양산 출신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이징옥 얘기가 울산에서 자주 회자된 때가 있다. 그때가 이상주 총장이 울산대학교 총장으로 있던 1990년대였다. 이징옥 장군의 17대손인 그는 당시 자주 자신이 이징옥의 후손이기 때문에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다면서 자랑을 하곤 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징옥의 아들 한 명은 이징옥이 난을 일으켰을 때 불국사 아래 신계마을에 숨어 살게 된다.

아들이 신계마을까지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가 있다. 이징옥 조상들은 이때까지만 해도 본관이 양산이씨였지만 이때부터 인천이씨가 된다.

경주 건천 출신이었던 이 총장도 지금은 본관이 양산이씨가 아니고 인천이씨다. 이 총장은 김대중 시절 대통령비서실장을 거쳐 교육부장관, 강원대·울산대·한림대 총장 등 높은 벼슬을 했다. 이징옥 난으로 오랫동안 벼슬을 못했던 인천이씨 문중으로 보면 오랜 한을 푼 셈이다. 울산대 총장으로 있는 동안 대학과 울산사회 교류를 위해 힘썼던 그는 지금은 경기도 하남시에서 부인과 함께 조용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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