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울산의 애국지사가 발로 뛰며 써내려간 ‘3·1운동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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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울산의 애국지사가 발로 뛰며 써내려간 ‘3·1운동 백과사전’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8.0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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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락 옹이 남창 3·1운동에 직접 참여한 후 전국을 돌면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들을 만나고 만세운동 현장을 탐사한 후 발간한 은 그동안 전국 지자체에서 참고할 정도로 내용이 방대하면서도 정확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쉬움을 주고 있다.
▲ 이용락 옹이 남창 3·1운동에 직접 참여한 후 전국을 돌면서 만세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들을 만나고 만세운동 현장을 탐사한 후 발간한 은 그동안 전국 지자체에서 참고할 정도로 내용이 방대하면서도 정확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 아쉬움을 주고 있다.

일제의 감시명단에 이름 올랐던
울산 ‘불량선인’ 중 한명인 이용락
남창 3·1운동 주도했다가 옥살이
생계 어려움과 일제의 감시 속에도
한일 오가며 힘든 시절 꿋꿋이 버텨 

1943년 귀국후 본격적인 집필 시작
전국 돌며 만세운동 현장 확인하고
애국지사들 직접 만나서 자료 수집
어려운 재정 탓 1969년에야 첫 발간
별세후 뒤늦게 정부 표창·훈장 수여


남창 3·1운동은 학성이씨가 중심이 되어 많은 유림이 참여했지만 이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용락 옹이다. 이 옹은 남창 3·1운동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해방 전후 전국을 돌면서 3·1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만나 이들을 중심으로 <3·1운동 실록>을 남겼다.

이 옹은 남창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앞장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는 거사 전날인 4월7일 동지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밤새워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다음 날 남창 장터로 가 장꾼들이 모여들기를 기다렸다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스스로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당황한 왜경들이 총을 쏘면서 만세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체포할 때 그는 재빨리 몸을 피해 장터에 있던 포목상점으로 갔다. 그리고 이 상점에서 광목 4자를 얻어 이 광목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글을 쓰고 장대에 매단 후 다시 장터에서 깃대를 흔들면서 기세를 높였다.

장꾼들이 해산하자 집으로 돌아온 그는 마을 사람들을 다시 자신의 집에 모아 다음날이 목도장날이라 이곳에서 다시 만세운동을 벌이려는 계획을 세우다가 왜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는 대구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6월이 확정돼 대구형무소와 경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출옥했다.

오늘날 보훈처에서 3·1운동에 참가했던 애국지사들을 찾아내고 이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그들을 선양하고 또 각 지자체가 지역의 3·1운동사를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이 옹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3·1운동 실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사학자도, 문필가도 아닌 이 옹이 <3·1운동 실록>을 쓴 것은 후손들이 3·1정신을 잊지 않고 이어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이 옹은 책의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3·1운동에는 남녀 구별도 노소의 가림도 없었다. 학생들은 책가방을 밀치고 농부는 괭이를 내던지고 손에손에 태극기를 들었다. 도회지 거리마다 태극기 물결이 넘치며 시골의 장터마다 만세 소리가 더 높았다. 거리마다 집집마다 태극기의 물결, 손에손에 태극기, 입입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당시 2000만 동포는 물론이고 모든 외국인을 포함해 천하 미물이라도 감동 받지 않았음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행렬이 구름 같고 만세 소리가 뇌성 같다고 해도 그것은 맥 주먹의 외침이요, 질서를 존중하는 평화 시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왜적의 총칼이 무자비하게 난무하였으니 우리 겨레의 죽음과 신음소리를 보지 않고 듣지 않은 오늘의 젊은이가 어찌 그것을 이해하며 우리 후대가 또한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조국 광복이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요 우리들 선대가 겪었던 피의 대가 일진데 어찌 우리는 저 3·1운동을 잊을 수 있으랴.

그런데 냉정하게 오늘을 직시해 보자. 애국심에 불타는 지사도 많고 조국 쟁취의 투사도 많다. 우리가 그들을 받들고 그들의 시중들기에 바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저 3·1만세를 외치다가 갈가리 찢겨 흔적 없이 사라져간 무명의 청년을 잊어서는 안되리라.

과거의 기억은 후대의 올바른 길을 선택하는 좌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선대가 흘린 피의 흔적을 어딘가에 모아 놓아야 했다. 여기에서 내가 능력에 닿지 않는 큰일로 <3·1운동 실록>을 쓴 것이다. 쓰러지면서도 외친 만세 여운에 귀 기울이고 그날의 감회가 새삼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1943년부터 취재를 시작한 이 책은 한참이나 지난 후 발간됐다. 그동안 그는 전국을 돌면서 3·1운동에 참여했던 애국지사들을 만나고 객관적인 문헌을 뒤져보고 이를 바탕으로 현장을 답사했다. 그리고 독립운동 관련 내용은 일일이 확인을 받은 후 이를 책에 첨부했다.

이 옹은 3·1운동 관련 귀중한 역사서를 남겼지만 그의 개인 생활은 어려움이 컸다.

출옥했을 때 그에게는 두 가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먹고 살길이 어려웠고 두 번째는 왜경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시도 때도 없이 경찰서에 불려다녀야 했다.

3·1운동에 참여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부자는 아니었지만 조상이 가꾸어온 전답이 있어 이 전답으로 먹고사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선비의 후손답게 서당에서 한문 공부도 했다.

그러나 3·1운동 참가와 감옥 생활은 이런 이 옹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출옥 후 먹고 살길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 가면 우선 막노동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경찰서에 불려 다니지는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처음부터 빗나가고 말았다. 1921년 일본으로 가 교토(京都) 염색공장에 취직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본적지 조회로 그가 3·1운동을 한 것이 밝혀지면서 공장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감시를 받으면서 경찰서에 자주 호출됐다. 그런데 경찰서를 자주 출입하다 보니 나중에는 왜경과 친해져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좋은 직장을 알선해주겠다는 유혹도 받았다.

그러나 이를 거절하고 이번에는 오사카(大阪)로 가 양복점에 취직했다. 이곳에서도 왜경이 심하게 감시해 고생만 하다가 1943년 귀국했다. 귀국 후 고향으로 왔던 그는 이때부터 <3·1운동 실록>에 매달렸다.

문제는 호구지책이었다. <3·1운동 실록> 취재와 집필로는 먹고 살길이 없었다. 더욱이 전국을 돌면서 애국지사들을 만나고 3·1운동 현장을 방문하다 보니 적지 않은 비용도 필요했다. 하는 수 없이 노동을 해서라도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1949년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도 지속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애국지사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먹고사는 것이 급해 책 발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부산에서 궁핍했던 생활은 아내와 함께 3명의 아들 그리고 이미 결혼했던 장남 동헌의 가족이 두 칸 방에 함께 살면서 동헌의 노동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데서 알 수 있다.

다행히 1963년에는 ‘사답법인 3·1동지회’가 생겨나면서 그도 이 단체의 평의원이 되었다. 이때 그는 ‘3·1동지회’에서 책을 발간해 줄 것을 희망하면서 8년간 소중히 모았던 귀중한 자료들을 동지회에 넘겼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는지 3·1동지회가 책을 빨리 발간해 주지 않았다. 그는 이때 200자 원고지로 6000장이 넘는 자료를 넘겼지만 책이 발간되지 않아 크게 실망했는데 그 기록도 남아 있다.



‘정리가 다 된 글을 책으로 만드는데도 곤욕을 치러야 했다.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체면 없이 중앙 요로에 청원 서신도 띄웠지만 모두가 여의치 않아 귀중한 원고가 잘못하면 휴지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나의 고통을 일본에 사는 동생 중락이 알고 출판비를 보내 주어 책을 겨우 발간할 수 있었다. ’



이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 책이 처음 발간된 때가 1969년 2월10일이었다. 이때는 재정이 어려웠기 때문인지 책 말미에 ‘400권 한정 비매품’이라고 써놓았다.

이 책은 처음 출간 후 4반세기가 지나 다시 발간되었다. 이때는 문중에서 처음 발간된 책이 한문이 많아 한글세대가 읽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 한글 중심으로 발행했는데 이때도 재정이 어려워 겨우 300권만 출간했다. 요즘도 이 책을 구하는 것이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이때는 이미 이 옹이 타계한 한참 후였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아 책을 만드는 동안 고생했던 그는 75세까지 살다가 1972년 별세했다.

정부의 공훈도 늦어 1977년 대통령 표창 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일제의 정책을 펴는데 저항했던 조선인들을 ‘불량선인’이라는 낙인을 찍어놓고 늘 감시했다. 울산에서 ‘불량선인’의 명단에 올랐던 인물로는 고기룡(온양면 운화리), 손무석(강동면 입석리), 이종만(울산군 우정동)과 함께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것은 이 옹이 일제강점기 내내 다른 3명과 함께 철저한 감시·감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성이씨 문중에서는 늦은 감이 있지만 최근 이 옹의 이런 행적을 바탕으로 문중 차원에서 이 옹의 선양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문중은 우선 이 옹이 어렵게 발간한 <3·1운동 실록>의 재발간을 추진하고 다음으로 남창 3·1운동 때 애국지사들이 모여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를 했던 온양읍 신경리 이 옹 집을 항일 유적지로 알리기로 했다.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3·1운동의 ‘백과사전’이라고 볼 수 있는 <3·1운동 실록>이 빛을 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그동안 이 옹 자신의 사비와 문중 차원에서 발간됐던 <3·1운동 실록>이 정부 차원에서 재조명 되기를 바라본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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