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이름도 주검도 남기지 못한 울주군 출신 16세 소녀 빨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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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이름도 주검도 남기지 못한 울주군 출신 16세 소녀 빨치산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9.2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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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이의 빨치산 활동을 얘기하고 있는 구연철씨.
▲ 서영이의 빨치산 활동을 얘기하고 있는 구연철씨.

요즘처럼 가을이 깊어 갈 무렵이면 울산 북구 무룡산 삼태봉에는 겨울 채비를 하는 비석이 있다. 비석은 손질된 돌이 아니고 자연석이다. 그것도 자그마한 바위로 주위에는 비석보다 큰 바위가 이 비석을 감싸고 있다.

비석에는 ‘서영이 잠든 곳’이라고 쓰여 있다. 비석 주위의 큰 바위들은 서영이 토벌대와 싸우다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차폐물로 이용했다. 비석 앞에는 언제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알 수 없는 조화가 있다.

서영은 가명이다. 왜냐하면 서영은 빨치산이었기 때문에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신불산의 남도부 대장과 또 남도부 밑에서 인사총책을 맡았고 서영이 죽을 때 함께 토벌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던 구연철(92·부산 해운대)씨뿐이다. 빨치산은 입산하는 날부터 가명을 사용하게 되어 있고 아무리 친해도 과거는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라 가족들이 불렀던 본명은 알 수 없다.

▲ 울산 북구 무룡산 삼태봉에 세워진 서영이 비석
▲ 울산 북구 무룡산 삼태봉에 세워진 서영이 비석

그런데 서영의 본명을 가르쳐 줄 남도부는 이미 70여 년 전 대구에서 총살당했고 구연철씨는 지금까지 살아 있지만 입을 열지 않고 있다. 다만 이 소녀의 집이 울산 울주군 두동면에 있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무룡산을 등산하면서 이 비석을 보는 사람들은 왜 이런 비석이 여기에 있느냐고 궁금해한다. 서영이 살아서 말할 수 있다면 ‘인민의 해방을 위해서였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서영이 빨치산이 된 것은 부모가 모두 먼저 입산했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해방 후 두동면에서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1949년 그들의 행적이 드러나면서 부모는 외동딸 서영을 인근 마을에 살고 있던 고모에게 맡기고 신불산으로 들어갔다.

서영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식구가 많아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는 고모 집에 얹혀사는 일이 미안했고 또 주위 사람들이 그를 두고 ‘빨갱이 자식’이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런데 6·25가 터지자 마을에는 빨치산이 득실거렸고 이때 부모의 거처를 알았던 그 역시 산행을 결심하고 신불산으로 들어갔다.

신불산에 들어와 보니 어머니는 토벌대에 쫓기다가 자살해 버렸고 아버지는 다른 지역으로 파견을 나갔으나 토벌대와 전투하다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부대원들은 서영에게 다시 고모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했고 2~3년 이곳에서 훈련받은 후 16살의 자랑스러운 여전사가 됐다.

이 무렵 남도부는 강동 바닷가에 사는 주민의 선무공작을 위해 무룡산에 아지트를 설치키로 했다. 무룡산에 아지트를 설치한 배경에는 무룡산 아랫마을인 농소 일대에 자생 빨치산들이 많은 것도 요인이 됐다.

농소 빨치산 중 대표적인 인물이 곽희달로 곽씨는 무룡산 삼태봉 인근에 아지트를 두고 매일 밤 마을로 내려와 지역민들을 꼬드겨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한때는 곽씨가 이끄는 부대가 농소에 있던 전신주 통신망을 모두 끊는 바람에 한동안 농소가 해방구가 되기도 했다.

더욱이 북구 호계 일대에는 6·25 무렵 형산강 전투에 대비해 미군들이 많이 주둔했기 때문에 미군의 참전을 저지하고 또 보급품 확보 차원에서 남도부는 이곳에 직할 부대가 필요했다.

무룡산 아지트 파견 대장으로는 남도부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구연철이 임명됐고 구씨는 5명의 빨치산을 차출해 무룡산으로 왔는데 그 속에는 여전사 서영도 있었다. 당시 구씨의 관할 구역은 무룡산은 물론이고 경주 토함산 심지어 일월산까지 확대됐다.

구씨는 무룡산 아지트를 현 송정저수지 위 옛 서당골에 설치했다. 서당골은 조선시대 말부터 서당이 있었던 마을로 구씨가 아지트를 마련할 때만 해도 인가가 3~4채 있었다.

아지트는 서당골에서 좀 떨어진 숲속에 있었지만 구씨는 이들 민가와 내왕하면서 강동 주민들을 상대로 선무 공작을 벌였다.

구씨는 강동 일대에서 선무공작을 펼 때가 좋았다고 회상한다. 구씨는 강동 인근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이라 쌀과 보리 등 농산물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생선도 많이 주어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느 날 선무공작을 마치고 아지트로 돌아오던 중 토벌대를 산속에서 만나 교전을 벌였다. 이때 구씨는 자신과 서영, 경주 출신의 임영길이 토벌대를 교란하는 사격을 할 때 나머지 3명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 무렵에는 서영도 훈련을 많이 받아 행동이 민첩했고 총을 다루는 솜씨도 남자 대원에 뒤지지 않았다.

이렇게 맞대결할 때면 불리한 쪽은 토벌대가 아니라 빨치산이었다. 우선 토벌대는 빨치산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고 무기도 성능이 좋았다. 탄약도 많아 토벌대는 총을 멋대로 쏠 수 있었지만, 빨치산은 총알을 아껴야 하므로 정조준으로 사격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빨치산이 겁 없이 용감히 행동하는 데 비해 토벌대는 빨치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서영은 구씨로부터 5m 정도 떨어진 바위 뒤에 숨어 토벌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질 무렵 서영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구씨는 서영쪽으로 기어가 보았다. 서영은 복부에 총을 맞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오랜 전투 경험을 통해 팔다리에 총상을 입으면 머큐로크롬을 바르고 가루약을 뿌리면 지혈이 되지만 복부에 총알을 맞으면 응급 처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중에도 교전은 계속돼 일단 서영을 옆으로 눕혀 놓은 채 구씨는 총을 쏘았다. 그는 총을 쏘면서도 서영이가 들을 수 있도록 “조금만 참고 기다려. 이제 곧 주위가 어두워지면 놈들이 퇴각할 것이고 그러면 너를 소지구당 의무대로 데리고 갈수 있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주위가 어두워지자 토벌대는 사격을 멈추고 철수했다. 그러나 서영을 살리기에는 피가 너무 많이 흘렀다. 서영은 숨을 거두면서 “부장 동무, 나 잘 싸웠다고 동무들에게 전해 주세요. 동무가 보아도 나 용감히 잘 싸웠지요”라는 말만 남겼다. 구씨는 이 말을 꼭 대원에게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구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덤을 만들어 토벌대의 눈에 띄지 않도록 묻는 일밖에 없었다. 그러나 겨울이다 보니 땅이 얼어 흙을 팔 수가 없었다. 이런 때는 계곡에 시신을 가져다 놓고 시신 위에 낙엽을 덮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서영은 이런 방법으로 시신이 처리됐다. 구씨는 멀지 않아 평화가 오면 그의 시신을 꼭 무덤을 만들어 묻어주겠다는 약속을 마음속으로 했다.

그러나 아지트로 돌아온 후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남북 간 휴전협정이 되면서 그는 신불산에서 부산으로 내러 와 지하조직을 만들기 위해 힘썼다. 그러다가 1954년 4월 부산 경남도청 앞에서 체포됐다. 산에 있을 때만 해도 구씨는 만약 자신이 경찰에 체포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영광스러운 죽음은 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원을 숨기기 위해 남의 도민증에 붙일 사진을 찍은 후 이를 찾으려고 도청 앞 사진관에 왔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그는 울산 동구 출신의 장두천 등 다른 2명과 함께 구덕산에 아지트를 두고 활동했는데 이 사건으로 신문 사회면을 크게 장식했다. 구씨는 무기징역을 언도 받아 20여 년 동안 옥살이했다. 옥살이하는 동안 전향만 했더라면 이 보다 빨리 출옥할 수 있었지만 이를 거절했다.

구씨가 마음속으로 서영이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은 칠순을 넘어선 2000년대 초였다. 이 무렵 그는 그를 따르는 부산과 울산의 젊은이들과 함께 신불산을 찾아 옛날 그와 함께 활동했던 빨치산의 추모회를 자주 가졌다.

그때면 그는 신불산을 보면서 이렇게 우거진 수목들이 모두 동지들의 피와 눈물 위에 자란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는 무룡산에서 외롭게 죽어간 서영이를 생각하면서 당시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어간 서영이 얘기를 청년들에게 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얘기를 듣고 있던 청년들이 서영이가 죽었던 자리에 비석을 세우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구씨는 아직 비석을 세우는 것이 시기상조라면서 말렸지만, 청년들은 비석을 세웠다.

구씨는 비석을 세우는 날 서영이가 차폐물로 이용했던 바위 부근에 서영의 시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시신은 없었다. 대신 “부장 동무, 나 잘 싸웠다고 동무들에게 전해 주세요”라는 소리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부산 해운대 청사포에서 사는 구씨는 매년 가을이면 청년들과 함께 서영이가 잠든 곳을 찾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기력이 떨어져 찾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는 부산에서 함께 체포됐던 장두천의 기일에는 빠지지 않고 동구 일산을 찾아 유가족들과 추모한다. 필자는 몇 해 전 구 씨에게 “이 땅에 사는 당신에게 조국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는 나에게 조국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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