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냥 하는 것 없이 바쁘다. 느긋함을 잃고 자주 경솔해져 나부낀다. 미간에 힘이 들어가고 말투는 드세지고 이유 없이 빠른 걸음걸이는 늘 위태롭다. 낭만실조다! 마침표뿐인 산문적 일상에 쉼표와 느낌표, 물음표와 줄임표가 필요하다. 행과 연의 여백이 그립다. 시(詩)가 고픈 것이다.
나에게도 낭만이 흘러넘치던 서정시대가 있었다. 주말엔 시집을 읽으며 학생들과 함께 감상할 시를 고르고 시에 대한 느낌과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편지로 썼다. 해설서의 설명이 아닌 가슴으로 느낀 절절한 감동과 시인의 마음을 오롯이 전달하고 싶어 늘 애가 닳았다. 아이들에게 시인이 기쁘고 서럽고 분노하고 슬퍼했던 날들의 풍경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창을 내주고 싶었다. 늘 벅찬 감정을 따라오지 못하는 언어의 빈곤함에 울컥하면 아이들은 눈을 반짝여 힘을 보태주었다. 시와 관련된 서로의 경험을 나누다 보면 수업 시간은 웃음과 눈물이 갈마들어 마음이 절로 부풀어 올랐다. 백석과 윤동주, 김수영 시를 읽으며 나를 떠올리고 안부를 묻는 그 시절 아이들이 있어 시심(詩心)으로 충만했던 나의 서정시대를 흐뭇하게 추억하게 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요즘 나의 문학 수업은 모순투성이다. 시는 노래니까 느끼고 즐기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수학 문제 풀 듯 시를 재단하고 낱낱이 분석한다. 한용운 시인의 말처럼, 님만 님이 아니라 그리운 모든 것은 다 님이 될 수 있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의 정답만 강요한다. 제한된 시간 안에 빠르고 정확하게 답을 찾는 요령을 알려준다. 지극히 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시를 접한 이 아이들이 훗날 내가 가르쳤던 시들을 어떻게 기억할지 두렵다. 나는 학창 시절 배웠던 시들을 통해 마음의 격을 높일 수 있었다. 세상 그 무엇도 하찮지 않다고 말해주는 시가 있어 소박한 기쁨으로 하루하루 순하게 흘려보내고 휘청이는 순간에도 삶의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염치없는 바람이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도 시가 허기진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따뜻한 밥이 되었으면 좋겠다. 삶 언저리에 시가 머물며 언제든 손을 뻗어 스스럼없이 시집을 펼칠 수 있는 일상을 살았으면, 그리하여 시 읽는 기쁨을 누리고 나누는 정(情) 많은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가을이 되니 마음이 수런댄다. 그 마음을 펼쳐 보이면 시가 되지만, 아! 이다지도 어눌한 나의 말이여! 그러니 내 마음에 내려앉는 시인의 마음을 그냥 따라 쓸밖에. 이른 새벽 쌀을 안치고 어제 읽다만 시집을 꺼내 읽는다. 마음이 쿵 내려앉는 문장을 만난다. 행간에 걸친 우주만큼 넓은 의미를 생각하면서 시를 정성껏 한 자 한 자 눌러 쓴다. 늘 앞서 내닫던 마음도 글씨와 발맞춰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고요한 새벽 오직 사각이는 연필 소리만이 세상에 가득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쌓인 낙엽길을 거니는 것처럼 황홀하다. 사각사각…. 낭만과 서정의 물결이 넘실댄다.
황희선 화봉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