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점차 소멸되어 가던 1909년 10월26일 일제의 선봉에 서 있던 이토를 기차역에서 사살한 곳이다. 인기 작가 김훈이 최근 발표한 소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블라디보스톡을 거쳐서 하얼빈에 이르는 여정과 이토를 사살한 후 여순감옥에서 1910월 3월26일 사형집행을 당할 때까지 과정을 그렸다. 안중근 의사의 피 끊는 심경과 비장한 감회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쓰여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작가가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조선 청년이 몸으로 맹렬히 부딪쳐 간 여정과 그 몸으로 사형의 집행을 고스란히 감당해 나간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안중근 의사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전에 같이 의병활동을 하던 우덕순을 만나 함께 이토를 암살하러 가기로 한다. 하얼빈에 도착한 후, 우덕순과 함께 남은 여비로 옷 한 벌씩을 사 입었다.
의거 후 유능한 검사 미조부치는 안중근 의사를 신문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의 문명개조와 동양평화를 위한 노력을 오해한 것으로 몰아가는데 주력했다. 1심 판결은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안중근 의사는 항소를 포기했다. 그리고 선고 후 불과 1개월 8일만에 바로 여순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관동도독부는 사건 관련 공직자들에게 상여금을 지급했는데, 미조부치에게 가장 많은 상여금이 지급됐다.
사형집행 직전 안중근 의사는 동생 안공근에게 시신을 하얼빈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장소가 생기는 것을 그냥 놔 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유족에게 넘겨주지 않고 감옥 구내 공동묘지에 묻어버렸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일인 지난 10월26일 보훈처는 그 당시 지역신문에 실린, 일제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소나무관에 넣어서 공동묘지에 매장했다는 기사를 공개했다. 그러면서 보훈처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데 진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언론은 이 내용을 보도하면서, 독립기념관이 있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실었다. 사진 속에서 안중근 의사는 맑은 눈과 잘 생긴 얼굴로 하얀 셔츠와 더블버튼의 반코트를 입고 있는데, 추레하지가 않고 반듯하다. 안중근 의사는 총을 쏜 후 체포돼 찍힐 이 사진이 먼 훗날 역사의 한 장면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하얼빈에서 남은 여비로 옷을 사 입은 것일까?
소설 후기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실렸다. 어머니와 안중근 의사의 형제들은 블라디보스톡이나 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장남은 어릴 때 병사하고, 차남은 1939년 이토를 기리기 위해 일제가 서울 장충단 맞은 편에 세운 박문사에 가서 참배했다. 그리고 이토의 차남을 만나 사죄했다. 몇 년 후 딸도 남편을 데리고 박문사를 방문하고 참배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박문사를 철거하고, 그 부지를 민간에 매각했는데, 삼성이 그 부지를 매입해 현재 신라호텔이 세워져 있다.
안중근 의사의 처자식은 이국땅을 떠돌면서 먹고 사는 것만 해도 버거웠을 것이고, 아마도 조국의 독립 같은 것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은 이미 없어졌고, 일제의 지배는 전혀 끝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는 민초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을 수도 있다. 이해가 되면서도 안타깝다.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운 것이 그것만은 아니다.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맞서 싸우고자 할 때만 해도, 한반도는 분단되어 있지 않았고, 압록강과 두만강부터 제주도까지 하나의 큰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만 해도, 블라디보스톡에 들어가기 전에 황해도 서울 부산 원산을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일제를 무너뜨리고 독립이 되면 당연히 한반도 전체에 하나의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는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됐고, 서로 전쟁준비에 몰두해 온 것이 어느덧 일제 식민지 기간의 2배를 넘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희권 민가율합동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