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현대史]“한글을 목숨처럼 귀하게” 외솔 정신 받들어 열린 서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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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현대史]“한글을 목숨처럼 귀하게” 외솔 정신 받들어 열린 서예전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11.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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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솔 사랑 모임회’가 지난 5일 울산 울주군 두동면 비조마을에서 열었던 서예전은 유명 서예가가 작품을 출품하거나 전시장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외솔의 한글 사랑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전시회였다.

올해는 외솔 최현배 선생 탄생 128주년이다. 외솔은 1894년 10월 당시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집에서 가까운 병영교회에서 야간학습을 했는데 한글의 아름다움과 우수함을 외솔은 이때부터 깨달았는지 모른다.

지난 5일 울산 울주군 두동면 비조마을의 한 농가에서 외솔 탄생을 기념하는 서예전이 열렸다. 이 서예전에는 유명 서예가가 참석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서예가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전시장도 넓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서예가는 14~15명 정도 되었고 전시장도 3층 건물의 2층을 사용했는데 200㎡(약 60평)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모임 이름도 단순했다. 울산에서 한글 서예를 공부하면서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외솔 사랑 모임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모임이 만들어진 시점도 오래되지 않았다. 한글 서예를 공부한 기간은 대부분 오래되었지만 정작 모임이 만들어진 때는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울산이 한글 학자 외솔의 고향으로 외솔 기념관이 있고 또 울산이 ‘한글문화의 도시’로 불리지만 정작 외솔을 선양하고 한글을 사랑하는 한글 서예전이 울산에 자주 없어 이런 모임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울산에는 외솔을 기념하는 건축물과 조형물이 적지 않다. 울산 중구 병영 동동의 생가터에는 외솔기념관이 있다. 이곳에 기념관이 설 수 있었던 이면에는 울산 사람들의 힘이 컸다.

기념관이 들어서기 전 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생가터만 있고 집은 없었다. 생가터도 오랫동안 비워두다 보니 소유주가 확실치 않아 등기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 발 벗고 나선 사람이 당시 김철 중구문화원장과 조용수 중구청장이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2010년 기념관이 개관식을 가질 수 있었다. 실제로 생가와 기념관 건물은 2009년 완성되었는데 개관 일을 외솔 탄생일에 맞추다 보니 한해가 늦어졌다.

이외에도 울산중부경찰서에서 울산 북구 진장동으로 넘어가는 동천강 위에는 외솔교가 있다. 또 울산중부경찰서에서 동천강을 따라 동천체육관까지 내려오는 길은 ‘외솔큰길’로 부르고 있다. 중구 옛 서동로터리에는 한글을 상징하는 조형물도 있다. 이곳은 외솔 생가에서 직선거리로 1㎞밖에 되지 않는데 이 로터리가 외솔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바뀐 데는 비밀스러운 얘기가 있다. 외솔회는 이 로터리 이름을 바꾸면서 한글 학자에게 ‘로터리’를 한글로 바꾸면 어떤 이름이 좋으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가르쳐 준 이름이 ‘둥근갈림길’이었다. 이후 이 로터리는 ‘외솔둥근갈림길’로 불리고 있다.

외솔기념관이 개관할 때만 해도 울산에서는 외솔의 한글 사랑을 선양하는 한글 서예전이 열렸다.

2010년에는 외솔기념관 한글서예 초대전이 개최되었는데 이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많은 서예가가 작품을 보내기도 하고 전시회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조용선, 조종숙, 천갑녕, 최민필, 조현판, 류영희, 구자송, 김단희 등 내로라하는 서예가들이 참석했고 이들 외에도 부산과 대구 등 다른 지역에서도 유명 서예가들이 많이 참석했다.

서울 서예가들의 한글 서예전은 울산에 외솔 기념 한글 서예 초대전이 개최되기 전에 이미 있었다. 세종 한글 서예대전은 2000년 제1회 대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또 이에 앞서 1998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한글 서예대전도 지금까지 계속되면서 서울 사람들을 상대로 한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에 비하면 울산은 초라해 2010년 외솔기념관 개관을 기념해 열렸던 서예 초대전도 한 해로 그쳤다.

이후 기껏 울산한글 서예대전이 2014년 열렸지만, 이 행사도 2019년까지 지속되다가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울산 서예가들은 이처럼 울산에서 한글 서예전이 지속하지 못하는 가장 큰 요인이 예산 부족이라고 말한다.

서예전을 개최하는 데는 작가에게 최소한의 제작비를 지원해야 하고 또 대관료 등 적지 않은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인소득이 타 도시 보다 높다는 울산에서 돈타령만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시민들의 한글 사랑이 타 도시보다 미약하지 않나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외솔 사랑 모임회’는 이날 행사를 하면서 서예가들에게 사전에 작품의 주제를 주었다.

주제는 ‘한글이 목숨’이었다. 외솔은 한글을 목숨처럼 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 글을 자신의 저서에서 자주 언급하고 부르짖었다. 따라서 이날 회원들이 낸 작품 대부분이 외솔 어록에서 가져온 글이었다.

외솔은 일제강점기 한글을 사랑하다가 목숨까지 잃을 뻔한 적도 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금되었던 그는 1945년 1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옥중생활을 하던 중 8·15 광복이 되면서 석방되었다.

이날 꽃뫼 황선혜 회원의 작품에는 일제강점기 외솔이 옥중생활을 하면서 겪어야 했던 고생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1943년 함흥형무소 옥중생활을 회고하면서 ‘나날의 살이’라는 제목의 글은 이렇다.

‘옥중에 있는 이 목숨은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다. 평생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옥중의 이슬로 사라짐을 엿들어 알았다. 나의 마음은 나의 생명대신 한글 가로쓰기의 벼룸의 운명 그것에 휘감기어 있었다.’

들샘 장상옥도 외솔의 옥중 생활을 작품으로 내어놓았다.

‘그 글씨를 종이쪽지에 적어서 나의 입은 솜옷에 간직하여 두고서 나날이 아침마다 몸추는 검열을 받기를 너댓달이나 하는 동안에 나의 조마조마한 심리는 번번이 간을 녹이는 듯하였다.’

연우 김행자 회원은 ‘한글 나라’라는 외솔 시를 작품으로 내어놓았다. 이 글에서 외솔은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다.

‘한겨레 한마음으로 한데 뭉치어 힘차게 일어나는 건설의 일꾼 바른길 환한 길로 달려 나가자 희망이 앞에 있다 한글 나라에’

의암 이두수 회원도 ‘한글의 노래 중’에 있는 외솔 글을 내어놓았다.

‘볼수록 아름다운 스물넉 자는 그 속에 모든 이치 갖추어 있고 누구나 쉬 배우며 쓰기 편하니 세계의 글자 중에 으뜸이도다. 한글은 우리 자랑 민주의 근본 이 글로 이 나라 힘을 기르자.”

가슬 한경선은 외솔 서체로 ‘한글이 목숨’이라는 제목으로 <한글잡지> 창간호에 실린 외솔의 창간사를 썼다.

‘우리 조선 민족에게는 좋은 말 좋은 글이 있다. 더욱이 우리글 한글은 소리가 갖고 모양이 곱고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훌륭한 글이라 우리는 여태까지 도리어 이것을 푸대접하고 짓밟아 버렸으므로 매우 좋았으야할 한글이 지금에 이대도록 지저분하여 아주 볼모양 없이 된 것이다. 한 사십년 전에 우리 한힌샘 스승이 바른길을 열어 주므로부터 그 뒤를 따르는 이가 적지 않았고 또 이를 위하여 꾸준히 일하려는 이가 많이 일어나기에 이른 것은 우리 한글의 앞길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는 바이다.’

돌샘 신선례 회원은 판본체로 ‘한글이 목숨’이라고 크게 써놓고 ‘외솔 탄생 128주년을 맞아 외솔의 최현배 선생의 영원한 한글 사랑을 기리며’라고 적어 놓고 있다.

이날 전시회를 구경하기 위해 멀리 김천에서 비조마을까지 왔던 청악 이홍화 선생은 “오늘 전시회가 ‘한글문화의 도시 울산’을 더욱 빛나게 하는 작은 불빛이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외솔의 한글 사랑을 보여주는 숨은 얘기가 있다. 울산사람 중 외솔이 울산에서 2대 총선에 출마해 낙선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외솔은 해방 후 한때 조선교육심의회에서 일하면서 교과서와 공문서의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제창했다. 그러나 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이 국회의원이 되어 이를 입법화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총선 출마를 결심했다. 그러나 이런 높은 뜻을 울산 사람들이 몰랐던지 그는 추전 김홍조의 아들 김택천에 이어 2위를 하는 바람에 당선되지 못했다.

또 1960년대 초 울산문화원이 설립되었을 때 당시 박영출 원장은 재경향우회 회원들을 상대로 문화원에 비치할 도서를 기증 받기로 하고 서울로 가 외솔을 만난 적이 있다. 이때 박 원장이 외솔에게 명함을 주었는데 이 명함을 본 외솔이 “아니 왜 좋은 한글을 두고 문화원장이 명함에 한문으로 이름을 썼느냐”고 나무라는 바람에 박 원장이 무안을 당하고 돌아왔다는 얘기가 전한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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