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 법무에서 다루는 역외 사례들에 대응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전문 매체 가운데 영국의 법률전문 저널 ‘로 리뷰(The Law Reviews)’가 있다. 주요 법률분야의 동향과 주요사례, 시사점을 연구한 나라별 로펌 소속 변호사들의 기고로 구성되는 비정기 간행물인데, 지난 8월에는 세계 각국의 주주권 행사 및 주주행동주의를 분석한 특집호(The Shareholder Rights and Activism Review)가 발간되어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뉴스를 통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주주행동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주식시장 개방 및 관련 규제 해소로 외국인투자자들의 국내 기업 투자와 외국증권사들의 국내 영업활동이 가능하게 된 때부터였다.
행동주의 펀드를 표방한 해외 헤지 펀드들의 주도 하에 기업 지배구조 개선 또는 회계투명성 제고를 주된 요구사항으로 했던 초기 주주행동주의 활동들은 당시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주주가치 제고를 목표로 한 수십 년의 노력이 축적된 결과 상법과 자본시장법, 거래소 규칙의 제·개정을 통해 주주권의 구체화·제도화가 이루어졌고, 이제는 행동주의 펀드를 위시한 소수 주주들이 기업인수·합병, 분할에 있어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해외 뿐 아니라 국내에도 다수의 행동주의 펀드들이 설립되어 활동을 지속하게 됐다.
주주행동주의가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주주가치의 제고란 무엇일까. 기업이 유기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투입을 필요로 하고, 이 자본을 시장의 투자자들로부터 조달하는 경우 기업은 그 대가로 지분을 투자자들과 나누어 갖는다. 기업의 주주가 된 투자자들은 관련 법령, 정관과 주주간 계약에 정한 일정한 권리와 지위에 의해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는데, 주주행동주의는 참여기업이 비효율적인 경영, 부실한 이사회, 새로운 사업기회를 놓치는 회사인 경우 해당 문제 해결 시 기업가치를 높일 여지가 있으므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자본 배분 전략이나 운영상의 변화를 경영주체에게 요구하거나, 이사의 개입을 통해 새로운 경영진을 구성을 도모하는 데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게 된다. 주주가치의 제고란 결국 기업가치의 제고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내재 가치를 제고할 여지가 있는 기업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지난 8월11일 공정거래위원회 카르텔조사국은 정부 발주 철근 연간단가 계약입찰 과정에서 현대제철, 한국철강 등 국내 7대 제강사들의 담합사실을 밝혀내고 기업 당 수백억 원의 과징금과 관계 직원들에 대한 검찰고발을 처분한 바 있다. 이 사건이 주목되는 이유는 해당 기업들이 2018년에도 유통관련 담합 적발로 같은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사자도 관련 처분도 같다는 말은, 아무리 철근 시장의 과점성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기업들이 수백억 원의 불이익처분과 소속 근로자들의 형사 처벌을 감수해가며 법을 위반하는 사업행태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규제 리스크를 관리할 능력과 의지라는 해결책이 주주권의 행사로써 경영상 실현될 수 있다면 해당기업의 가치가 제고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
금융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해지고 자산가격이 꾸준히 오르면서 온 국민이 주식투자와 상장주 청약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치평가를 통한 옥석 가리기나 거시 경제에 대한 장기 전망 같은, 투자 관련 의사결정에 전제되어야 마땅할 골치 아픈 일을 하지 않아도, 어느 기업의 주식이든 사 놓기만 하면 가격이 올라 이익이 생기는 때였으니까 그럴 만 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호황의 시작을 예측하기 어려웠듯, 자본시장의 성장이 우상향을 멈춘 것도 어느 순간 현실이 되었다. 막연한 낙관에 의지해 탐욕을 제어하지 못한 투자자들은 차입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지금의 시절 그대로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고 했다.
전 지구적 불황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살아남는 기업들이 있을 것이고, 그 기업을 알아보고 믿음을 거두지 않은 투자자들이 또한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자본시장에서도 기업과 주주가 함께 성장하며 나이테를 그릴 수 있는 사례가 많이 생기는 2022년 연말이 되기를 바란다.
이준희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