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90)]세고비아 : 만화영화같은 판타지
상태바
[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90)]세고비아 : 만화영화같은 판타지
  • 경상일보
  • 승인 2024.03.15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세고비아(Segovia)는 스페인의 중북부 레온(Leon) 자치주에 속한 소도시다. 마드리드에서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하는 순례길의 경유지이기도 하다. 기원전 1세기경 로마인들이 정착했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서고트 왕국의 기독교인들이 정착했다. 7세기에는 이슬람인들이 진출했으나, 레콘키스타(재정복 운동)로 11세기부터 기독교인들이 재정착했다. 세고비아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양모와 직물 산업이 번창하면서 섬유 무역의 중심지로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오늘날에는 비록 지방의 소도시로 전락했으나, 보물같은 세계적 역사 유산을 3개씩이나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생에 한 번쯤은 꼭 들려볼 만한 장소다. 그 첫 번째 보물은 구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느닷없이 나타난다. 넓은 진입광장 아소게호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구조물, 바로 로마시대에 건설된 수도교(水道橋)다. 로마시대의 수도교를 여러 도시에서 많이 보았지만, 이처럼 거대하고 완벽히 보존된 사례는 본 적이 없다.

세고비아의 수도교는 1세기 후반에서 2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서, 로마 석조기술의 공학적 우수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도시 외곽의 수원지로부터 18㎞에 이르는 수도교를 2만5000개 이상의 화강암 석재로 만들었다. 2층의 아케이드로 축조되었는데, 1층은 지형의 고저차에 따라 높이가 다르고, 2층은 경사도 1%를 갖는 수로를 받치도록 경사지게 만들었다.

▲ 세고비아 알카자르.
▲ 세고비아 알카자르.

30m가 넘는 높이의 석조 아치를 마치 일주문처럼 1열로 세우고 2000년의 세월을 지탱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오늘날까지도 수도로 사용된다고 하니, 비유하자면 고구려 초기에 만든 상수도 설비를 현재까지 사용하는 격이다. 공학적인 탁월성뿐만 아니라 디자인으로서도 감동적이다. 올라갈수록 가늘어지는 체감율을 적용해 시각적 안전성을 만들고, 착시효과를 이용하는 등 예술적으로도 수월성을 갖추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인상적인 로마 건축물’로 손꼽을 만하다. 아치의 틀 속으로 담긴 도시풍경은 병풍처럼 도시경관을 분절한다.

세고비아가 품고 있는 두 번째 보물은 중세양식의 종교건축들이다. 가장 오래된 종교건축으로는 성 스테판(San Esteban) 교회를 꼽는다. 그중에서도 7층 높이를 갖는 종탑은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걸작으로 알려진다. 거칠게 마감한 석조건축이지만 창호 구성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하부에는 한 면에 2개씩의 블라인드 아치(Blind arch)로 창호의 윤곽만을 표시했고, 중앙부에는 창호의 크기를 약간 줄이고, 여러 겹의 테두리를 만든 아치로 실제의 창호를 만들었다. 최상부에는 크기가 작은 아치창 3개를 배치하여 변화를 주었다. 마치 피렌체의 르네상스 건축을 보는 듯하다.

구 유대교 회당(The old main synagogue)도 주목해 보아야 할 독특한 작품이다. 이 건축은 14세기에 유대교 회당으로 창건되었지만, 15세기에 유대인이 축출되면서 기독교 수도원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본당은 유대교 회당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평면은 3개의 아일(통로)과 2개의 네이브(신자석)로 구성된 회당의 모습이지만, 내부의 팔각형 기둥과 식물장식의 주두, 그리고 기둥 상부에 축조된 말굽형 아치 등은 무어(Moor)양식을 가지고 있다.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도 이른바 크로스오버(crossover)가 아닌가.

세고비아 종교건축 중 최고 걸작은 역시 세고비아 대성당이다. 16세기 후반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건물인데, 스페인에서 지어진 마지막 고딕양식이다. 이 시기에 고딕양식은 서유럽 일대에서 유행이 지난, 소위 ‘한물간 양식’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딕 전성기의 사례처럼 권위적이거나 위압적인 모습은 아니다. 90m 높이 달하는 종탑이 대성당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할 뿐, 외관을 특징짓는 버트레스와 피나클 등은 왕관의 장식처럼 화려하다. 고딕의 지방적 번안이라고나 할까. 더구나 입구는 생뚱맞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장식했다. 이렇듯 이민족과 이교도들이 공존하며 살아온 역사처럼 스페인 문화는 혼혈과 융합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성문을 지나 역사지구로 들어가면 2~3층짜리 투박한 건물들이 가로경관을 이룬다. 다양한 시대와 종교, 인종을 반영하는 듯 여러 양식들이 혼재되어 있다. 석조와 목골조, 로마네스크와 고딕, 무어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양식이 복합적인 가로경관을 연출한다. 관광용으로 깔끔하게 치장하지 않고, 수수하게 맨 얼굴을 드러내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시골 처녀의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는 듯하다.

애니메이션과 같은 구도시 가로풍경은 갑자기 전개되는 공원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바로크 식으로 조경된 공원의 끝에는 중세 영주의 성이 동화처럼 절벽 끝에 달려 있다. 그야말로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판타지, 바로 세 번째 보물인 알 카자르(Alcazar)다. 본래 알 카자르란 ‘요새’를 의미하는 무어인들의 용어다. 12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이 궁전으로 개축하면서, 역대 왕들이 가장 애용했던 별궁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세기 화재 이후 재건된 것이다. 너무 말끔하게 재건됐기에 오히려 고색창연한 맛은 적다.

하지만 어릴 적 처음 경험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황홀감이 그대로 소환된다. 실제로 신데렐라 성의 모티브가 될 만큼 신비로운 건축 요소를 갖추었다. 나지막한 성벽 위로 솟아오르는 뾰족지붕들도 동화스럽지만, 이들은 주 건물에 해당하는 요한 2세 탑의 배경일 뿐이다. 이 탑은 15세기에 유행한 스페인 고딕양식과 이슬람 건축의 요소를 적절하게 배합해 독특한 매력을 구사했다. 평평한 석조벽체 위에 돌출된 원통형 발코니와 망루들은 요란하거나 과장되지 않으면서 판타지를 자극한다. 그 발코니에서 왕비가 된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신고 나올 듯 하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울산 곳곳 버려진 차량에 예산·행정 낭비
  • [지역민도 찾지 않는 울산의 역사·문화명소]울산 유일 보물 지정 불상인데…
  • 확 풀린 GB규제…울산 수혜 기대감
  • 궂은 날씨에도 울산 곳곳 꽃놀이 인파
  • [기고]울산의 랜드마크!
  • 이재명 대표에서 달려든 남성, 사복경찰에게 제압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