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43)]광장에서 만난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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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43)]광장에서 만난 로마
  • 정명숙 기자
  • 승인 2020.03.12 2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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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1)
로마 시민대중들의 일상적 공간인
광장과 공회당은 그 자체가 예술품
역사가 현재 문화로 공유되는 로마
생명력 가진 지속가능한 도시로 성장
▲ 본래 로마시대 경기장이었던 라보나 광장. ‘4대강의 분수’ 등 바로크 풍 조각의 분수가 조성됨으로써 시민대중의 일상적 공간이었던 광장이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품격 있는 전시공간으로 거듭났다.

벌써 수차례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여전히 낯선 도시다. 미로처럼 얽혀진 골목길, 비슷비슷한 건물들과 생경한 가로풍경, 낯선 언어로 쓰인 표지판, 길을 헤매기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안내인이 없는 초행길이라면 몇 바퀴씩 돌아 같은 장소로 나오기도 하고, 지명도 알 수 없는 낯선 장소에 도달하기가 일쑤다.

복잡한 골목을 헤매다보면 광장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광장은 밝고 시원한 개방감과 더불어 터널을 빠져나온 안도감을 준다. 늘 사람들이 모이고, 해프닝이 벌어지며,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유럽의 중세도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로마에서도 지역을 특징짓는 장소는 단연 광장이다. 크기도 모양도 성격도 다르기에 랜드 마크의 구실을 톡톡히 한다. 이 도시에서 내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데 광장만한 곳이 없다. 광장이 없다면 이 도시는 영원히 난해한 도시가 될지도 모른다.

로마의 관광객들 대부분은 광장을 순례하는 것으로 로마를 경험한다. 역사적 유적이나 볼거리가 대부분 광장에 면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굳이 문화유산이 아니더라도 광장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머물게 하고, 즐겁게 만든다. 스페인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 일은 이미 로마를 즐기는 대표적 행위로 굳어져 버렸다.

이 도시의 기원도 실상 광장에서 시작된다. 플라티노 언덕 아래 포로로마노(Foro Romano), 기원전 8세기부터 로마의 심장이었던 곳이다. 포럼(Forum)은 시민들의 공적 생활공간인 광장을 의미한다. 수많은 신전과 공회당, 관청, 그리고 상업건물들이 광장을 둘러 세워졌다. 그곳은 종교와 정치, 문화의 중심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아고라를 만들어 그곳에서 민주주의를 꽃피웠다면, 로마인들은 포럼을 만들어 공화주의를 실현했다. 도시 중앙에 왕궁이나 관청을 두는 전제 주의적 도시구조와는 다른 점이다.

지금은 폐허처럼 건물의 일부만 남아있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로마의 영광을 반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치로 된 건물은 대부분 공회당(Basilica)들이다. 그리스 아고라에 스토아가 있었다면 로마인들은 포럼 주변에 많은 바실리카를 세웠다. 바실리카는 상업이나, 관청, 민회 등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공동체적 삶을 위한 건축, 바실리카는 포럼과 분리될 수 없는 대중적 공간이었다.

후에 공화정이 몰락하고 황제가 절대 권력을 누리는 제국으로 변하면서 황제의 이름으로 건설된 포럼도 등장했다. 이른바 임페리얼 포럼이다. 이것들은 플라티노 언덕 쪽에 주로 건설되었으니 포로로마노와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포로로마노가 시민들의 자발적인 건축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면 황제들의 포럼은 기하학적으로 정연하게 디자인된 의도적 권위의 공간이었다. 황제의 광장은 더 이상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자유롭게 의사를 교환할 수 있는 대중적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광장을 만드는 전통은 시대를 이어 지속되면서 새로운 디자인으로 발전한다. 캄피돌리오에서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광장과 만날 수 있다. 이는 천재 건축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광장이다. 교황은 그가 통치하는 새로운 로마의 장엄함을 나타내도록 요청했다. 중세기의 암울한 신성을 벗어내고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는 전략이 필요했다.

미켈란젤로는 투시도의 원근법을 이용하는 르네상스적 방법을 도입했다. 우선 광장으로 오르는 계단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도록 사다리꼴로 설계했다. 올라 갈 때는 짧아 보이고, 내려 올 때는 길어 보이도록 착시를 이용한 것이다. 광장에 오르면 로마의 전경이 바티칸까지 한눈에 담긴다. 황제에 버금가는 교황의 권위를 담으려 했을까. 축과 대칭, 중심성 등 기하학적 질서로 만들어낸 세계의 중심(caput mundi), 이는 로마를 계승하는 르네상스적 광장의 디자인이다.

본래 로마시대 경기장이었던 라보나 광장은 오브제(object)가 없었다면 긴 직사각형의 공허하고 무미건조한 장소였을 것이다. 여기에 바로크 풍 조각의 분수가 조성됨으로써 광장은 활기를 얻게 된다. 세 개의 분수가운데 베르니니가 설계한 ‘4대강의 분수’는 이 광장을 ‘바로크 양식의 기념비적 장소’로 바꿀 만큼 탁월한 것으로 알려진다. 시민대중의 일상적 공간이었던 광장이 예술품을 감상하기 위한 품격 있는 전시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하지만 트레비 분수만큼 발길을 모으는 광장의 오브제는 없을 것이다. 18세기 폴리궁전의 파사드를 배경으로 하는 이 분수 조각 작품은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다. 마치 고대 로마시대 극장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영웅적 신화가 생방으로 연출되는 현장과 같다. 절대왕조의 사치스러운 별궁정원에서나 볼 수 있던 최고급의 예술품이 거리로 나온 것이다. 18세기 왕이나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사치에 불과하지만 21세기의 로마를 대표하는 장소이며, 시대가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장소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래된 역사유산, 호화찬란한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도시는 무수히 많다. 기자의 피라미드는 4천년 이상의 이집트 역사를 자랑하며, 쉬라즈의 페르세폴리스는 2천5백년전 페르시아의 놀라운 건축술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유물일 뿐 현재와는 괴리되어 있다. 문화란 공유될 때 생명력을 갖는 법. 현대도시로서 로마의 생명력은 역사와 예술을 공유할 수 있는 광장을 갖는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가치임에 분명하니 이보다 더 지속가능한 도시 인프라가 있을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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