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태어난 명(命)을 알고, 살아갈 운(運)을 개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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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태어난 명(命)을 알고, 살아갈 운(運)을 개척하라
  • 경상일보
  • 승인 2025.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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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 김진명리학회 회장

운명이란 말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춘다. 그것은 때론 피할 수 없는 신의 섭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어떤 실수나 실패를 정당화하는 변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천명지운(天命地運)’은 운명을 이해하기 쉽도록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누구도 탄생과 죽음을 거부할 수 없다. 하늘이 내려준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天命), 땅에서 펼쳐지는 삶의 흐름을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라(地運)는 의미이다. 수용하되 수동적이지 않고, 자각하되 행동하라는 이 말은 지혜이면서 철학적사유와 맞닿은 부분이 많다.

첫 번째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ecede l’essence)는 말로 압축했다. 그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먼저 존재한 다음,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를 선택을 통해 결정하는 자유를 가진다”고 했다. 우리는 정해진 본질을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본질을 구성하는 실존적 주체다. 그는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것만큼의 존재다”(Nous sommes nos choix)고 하였다. 천명(天命)이 자유의 조건이라면, 지운(地運)은 그 자유를 실천하는 연속된 선택의 과정임을 역설한다. 운명은 외부에서 정해진 것이 전부가 아니라 바로 내면에서 나온 선택과 책임으로 다시 쓰인다.

두 번째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로 보았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세계 속에 던져져 있다”고 했다. 태어난 시간과 장소, 환경, 육체적 조건, 언어와 문화는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다. 하지만 그 ‘던져짐’은 체념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의 출발점이다. 그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죽음을 자각하며 유한한 생을 진정성 있게 살아가는 것이 본래적인 실존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천명(天命)은 던져진 조건이고, 지운(地運)은 그 조건에서 생사(生死)를 자각하고 스스로 길을 만드는 결단이다.

세 번째 영국의 분석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 존재와 자유, 그리고 도덕적 책임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남겼다. 그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맹목적인 권위나 운명론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적 탐구와 인간의 선택 능력을 강조한다. 러셀은 “종교는 지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면에서도 해롭다” “종교는 주로 두려움에 기반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신앙과 전통의 이름으로 인간의 사유가 억압되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에게 천명(天命)은 세상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고, 지운(地運)은 그 질문에 이성과 윤리적인 판단으로 응답하는 실천이다.

네 번째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 신화>에서 인간 존재의 부조리와 맞서는 자세로서 반항과 의지를 강조했다. 삶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가치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의미 없는 세계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행위를 반복하듯, 고통과 무의미를 딛고 매일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는 “반항하는 인간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라고 하며, 인간은 부조리 앞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고 삶을 창조할 수 있는 존재임을 주장했다. 그에게 천명(天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부당한 구조이고, 지운(地運)은 그 구조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끈질긴 저항이다.

사르트르는 자유, 하이데거는 자각, 러셀은 이성, 카뮈는 반항으로서 각자의 철학적사유를 부각하고 있다. 인생은 고정된 각본에서 시작되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자신이 써 내려가는 유동적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다. 명(命)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일이며, 운(運)을 개척한다는 것은 어디로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운명은 필연만이 아니라 가능성도 함께한다. 운명이란 이름의 울타리를 넘어서려는 그 의지 안에,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있다. 자신의 본질을 아는 것이 먼저이다. 다음으로 우리의 언행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다. 하늘은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줄 뿐이다.

김진 김진명리학회 회장

※외부원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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