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의 불역유행(不易流行)(24)]폭싹 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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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민의 불역유행(不易流行)(24)]폭싹 속았수다
  • 경상일보
  • 승인 2025.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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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철민 울산대 교수 전 울산시 국제관계대사

얼마 전 친구의 권유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시청했다. 주말 이틀 동안 16회 전편을 몰아봤다. 보기 전에는 뭘 그렇게 많이 속았을까? 사기당한 가족이 겪는 서글프고 속상한 이야기인가 했다. 아니었다. 탄탄한 스토리 전개에 출연자들의 국보급 연기는 드라마 몰입을 강요했고 몇 편을 채 보지 않아 그 뜻이 “수고 많았구려”라는 제주도 사투리임을 알게 됐다.

제목이 참 구수하다. 내용과 구성도 마음에 닿았고 영상 또한 만족스러웠다. 아역부터 노인 역할까지 주인공들은 매 순간 심금을 울렸고 조연들의 연기가 어찌나 감칠맛 나던지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현재 한국 영화와 TV 드라마 수준은 세계적이고 지구 곳곳에서 한국어를 배우게 하는 동기부여의 원천이 되고 있다.

주헝가리 대사로 재직 당시 새로 뽑은 비서 ‘안나’는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를 익혔다고 했고, 고국인 헝가리 다음으로 한국을 사랑한다고 했다.

25년 전 첫 해외 근무지였던 네덜란드에서는 매주 금요일이 빨리 오기를 바란 적이 있다. 블록버스터와 한인 가게에서 미리 빌려둔 한국 드라마와 외국 명화들을 실컷 한꺼번에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디오 임대 가능 여부로 부임지를 선진국 또는 후진국으로 구분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넷플릭스가 대세가 됐고, 초대형 스크린에 일등석 안락의자를 갖춘 극장도 한산하기만 하다.

우리는 지금 숨 가쁠 정도로 급한 세상에 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디지털전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TV 스크린이 없는 세상이 곧 올 수도 있다.

공원 벤치, 해변 모래사장 등 어디에서나 홀로그램과 가상현실(VR) 시청 기기를 통해 영상을 맘껏 즐길 수 있게 된다. 음악과 미술도 마찬가지로, AI 로봇이 연주하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심취하고, 챗봇이 그려주는 미술의 마력에 흠뻑 빠지게 될지 모른다.

▲ 이태리 피사에 남겨진 키스해링의 벽화 유작.
▲ 이태리 피사에 남겨진 키스해링의 벽화 유작.
▲ 영국 런던 뱅크시 터널에 그려진 뱅크시의 ‘Cave Painting Removal’ 벽화.
▲ 영국 런던 뱅크시 터널에 그려진 뱅크시의 ‘Cave Painting Removal’ 벽화.

현대미술 사조는 19세기 말 인상주의에서 시작해 20세기 초 후기 인상주의로 발전했다. 이어 뭉크와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표현주의, 마티스를 축으로 하는 야수파(Fauvism)와 피카소의 입체주의를 거쳤다. 1950~1960년대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으로 대표되는 팝아트 이후 멈춰있던 미술계는 ‘어반아트’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정립되고 있다.

‘거리 예술(Street Art)’과 그라피티(Graffiti)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시각예술 형태인데, AI 예술 도래 이전에 인류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마지막 미술 사조일 수 있기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지난해 6월 말부터 4개월간 울산시립미술관에서는 ‘반구천에서 어반아트’라는 제하로 존 원, 세퍼드 페어리, 빌스, JR, 제우스, 토마 뷔유 등 세계적인 어반아트 작가 8명의 300여작품들이 전시됐고, 4만여명이 다녀갔다. 같은 장소에서 지난 5월1일부터 존원 개인전이 열리고 있고, 8월이면 빌스의 작품전이 또 3개월간 이어질 것이다. 그라피티 예술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이들은 지난해에 울산을 방문했고 곳곳에 벽화를 남겼다.

올해 3월엔 ‘무슈샤(노란 고양이)’ 작가로 알려진 토마 뷔유가 장생포 문화창고 전시회를 계기로 울산을 다시 찾았고, 장생포 웰리키즈랜드, 종하창조경제혁신센터, 중구종갓집도서관 등에 벽화를 남겼다. 벽화 속 고양이는 월계관을 쓴 울산 공업탑을 배경으로 울산 고래 ‘장생이’와 어깨동무를 했고 ‘울산큰애기’와는 동화책을 함께 읽고 있다. 그림 속 노란 고양이는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있는데, 작가는 기분이 좋을 때만 고양이 등에 날개를 달아 준다고 했다.

그런데 유독 울산 벽화에 날개를 단 천사 고양이들이 많다. 예술문화계의 노벨상으로 알려진 프랑스 정부의 레지옹 도네르 훈장을 2015년 수상했던 존원도 당초 5월 개인전 개막식 때 울산을 다시 방문해 벽화 몇 점을 남겨줄 계획이었는데, 미술관 측 행정 처리가 늦어지고 작가 개인 사정도 겹쳐 불발된 점은 아쉽다. 그렇기에 7월 재방문하게 될 빌스에게 거는 기대감이 크다.

빌스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벽을 조각해 인물의 초상화를 만드는 독특한 기법으로 저명하다. 지난해에는 울산문화예술회관 입구에 울산의 대표 동식물인 고래와 장미와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걸작을 남겼다. 올해도 가급적 많은 그의 벽화가 남겨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데, 울산과학대학교 동구 캠퍼스, 종하창조경제혁신센터, 울주군청 등을 대상지로 고려 중이다.

세계적인 그라피티 예술가들의 벽화가 곳곳에 100개 정도 그려진다면 울산은 ‘뉴반구천’ 벽화 도시로 다시 태어나 명실공히 문화관광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챗GPT에 “세계적인 그라피티 벽화 도시는 어디인가?”라고 물으면 베를린, 뉴욕, 런던, 멜버른, 파리, 리스본, 보고타 등이라고 알려준다.

그라피티 작가 키스 해링은 “예술은 갤러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거리 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며 뉴욕, 베를린, 파리, 암스테르담, 바젤 등에 벽화 작품을 남겼고 그의 유작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특히 뉴욕에 남겨진 1986년 작 ‘Crack is Wack(마약은 고약해)’은 강력한 메시지로 마약 중독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얼굴 없는 작가로 잘 알려진 뱅크시는 런던 리크 스트릿 터널내에 선사시대 라스코 동굴 암각화를 고압 세척기로 지우고 있는 도시 청소 노동자의 모습을 묘사한 ‘Cave Painting Removal’를 그려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한 충격과 아이러니를 전달하고자 했다. 7월 공식 발표될 반구천의 유네스코 등재 성공을 기념해 그즈음 방문할 빌스의 암각화 작품으로 ‘21세기 뉴반구천’이 탄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훗날 누군가는 이렇게 평가할 것이다. “폭싹 속았수다”라고.

박철민 울산대 교수 전 울산시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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