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호의 울산 전란사(11)]일본의 신라 침공과 침공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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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호의 울산 전란사(11)]일본의 신라 침공과 침공 계획
  • 경상일보
  • 승인 2025.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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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
▲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

1. 일본의 신라 침공

김부식의 <삼국사기> ‘본기 권8 성덕왕’을 보면, 신라 성덕왕 30년(서기 731년) 4월에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했으므로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관한 일본 측의 기록이 전하지 않는 데다가 우리 측 기록도 <삼국사기> 외에는 미비한 편이어서 크게 주목받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삼국사기>가 대체로 사실에 근거한 기록임을 고려한다면 무시할 수 있는 기록 또한 아니다. 위의 기록에 대한 학계의 논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가 성덕왕 21년(722) 10월에 모벌군성을 쌓아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며 일본에 대해 강경한 외교정책을 추진하자, 일본이 병선을 보내 신라에 보복했다는 견해(김수태, <신라 중대 정치사 연구>, 1996, 81쪽), 상재상(上宰相)으로서 친일본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던 김순정이 사망한 이후에 대일 외교에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던 사공이 성덕왕 27년(728) 상대등에 임명되자 이에 반발한 일본이 병선 300척을 보내 신라의 동쪽 변경을 침략했다는 견해(전덕재, <신라 중대 대일 외교의 추이와 진골 귀족의 동향>, <한국사론> 37, 1997, 21~22쪽)가 있다.

한편, <속일본기>에 731년에 일본 병선이 신라를 침략했다는 기록이 전하지 않은 사실에 주목해, 일찍이 일본인 연구자 츠다사 오키치는 본 기록을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津田左右吉, <新羅征討地理考> <艘鮮艘史地理究第1>, 1964), 또 다른 일본인 연구자 스즈키 야스타미는 일본국 병선은 대한해협 쪽을 경비하던 대재부나 산음도 제국의 선박이었으며, 본 기록은 이들이 신라 배를 만나 쌍방 간에 충돌을 빚은 사실을 전한 것이라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했다(鈴木靖民, 「天平初期の對新羅關係」, <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 1985, 165∼170쪽).

2. 신라 침공 계획

백제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무렵, 일본은 나당연합군이 침공해 올 것을 두려워해 규슈에 성을 쌓는 등 침공에 대비했다. 하지만 당이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 신라마저 병탄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신라는 당과 전쟁하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다. 서기 668년 9월(문무왕 8년) 신라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7년). 이후 양국은 신라에서 공식적인 사신을 파견한 마지막 해인 779년(혜공왕 15년)까지 교류했는데, 신라는 일본에 45회 사신을 파견했고, 일본은 신라에 25회 사신을 파견했다. 실제 나당전쟁 동안 일본은 전쟁에 관여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이 무렵에 일본은 국호를 ‘왜’에서 ‘태양의 근본’이라는 뜻을 가진 ‘일본’으로 바꾸면서(<삼국사기> 권6, 문무왕 10년(670)) 자존 의식을 높였다. 그런데 일본의 자존 의식 표방은 두 국가 사이에 외교 형식 문제로 갈등을 빚게 했다. 당을 본떠서 천황제 율령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일본 조정은 대외관계에서도 신라를 하위에 놓는 외교 형식을 고집했다. 일본의 자존 의식이 신라에 대한 상국 의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런데 나당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되찾은 신라는 이러한 일본의 태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속일본기> 737년 기록에 의하면, “신라가 항례(恒禮)를 잃었다”라는 사신의 보고에 자존심이 상한 일본 조정이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이때부터 ‘신라를 응징하자’라는 말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두 나라의 관계는 경덕왕 때에 급속히 나빠졌다. 이때 일본은 신라의 사신이 덴노에게 바치는 물건을 상국에게 바치는 진상품을 뜻하는 ‘공조’라고 칭할 것을 요구했고, 신라는 무리한 요구라며 이를 토산물의 의미인 ‘토모’로 칭하려고 했다(<속일본기> 권15, 쇼무 덴노 승평 15년). 742년, 일본은 신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신라는 입국을 아예 불허했고, 고켄 덴노가 753년 신라 경덕왕에게 사신을 보냈을 때 신라는 일본 사신이 오만무례하다는 이유로 쫓아냈다(<삼국사기> ‘경덕왕’ 조).

이런 일련의 상황 속에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신라 침공 계획을 세웠다. 일본 내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는 759년 전후로 꾸준히 진행됐다. 다음은 <속일본기>의 발췌 기록이다.

①배 500척을 만들게 했다. 북륙도 여러 나라에서 89척, 산음도 여러 나라에서 145척, 산양도 여러 나라에서 161척, 남해도 여러 나라에서 105척을 모두 한가한 달에 만들되 3년 안에 마치도록 했는데,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것이었다(준닌 덴노 천평보자 3년(759) 9월), ②미농과 무장 두 나라의 소년들에게 명해 나라마다 신라어를 배우게 했다.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서였다(준닌 덴노 천평보자 5년(761) 정월), ③참의 종2위 무부경 등원조신거세마려와 산위 외 종5위하 토사숙녜견양을 보내어 향추묘에 재물을 바치고,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훈련시켰다(준닌 덴노 천평보자 6년(762) 11월), ④종5위하 고마노아손 오야마를 무사시노스케로 삼았다(준닌 덴노 천평보자 5년(761) 겨울), ⑤무사시노스케 종5위하 고마노아손 오야마를 견고려사로 삼았다(준닌 덴노 천평보자 5년(761) 겨울)
 

3. 신라 침공 중단과 그 배경

그런데 일본은 침공을 목표로 한 762년에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배 500척을 만들고 신라어를 익히게 하는 등의 의욕적인 행보와는 달리 처음부터 전혀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했다. 일본이 신라 침공 계획을 실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침공하기가 쉽지 않았고, 침공하더라도 이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전쟁으로 인한 실익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 신라는 성덕왕-효성왕-경덕왕의 치세로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다. 또한 헤이안 시대 전기는 도호쿠의 에미시와의 대결의 시기여서 간토와 도호쿠 일대에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으므로 전선을 확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연합하자는 일본의 요청을 거절한 발해의 태도도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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