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큰일 날뻔했습니다. 산중에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서둘러서 민가로 내려가세요.”
국화가 눈을 떠 보니 자신을 어찌해 보려던 사내는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고 그녀에게 말을 하던 사내는 눈짓으로 어서 떠나라고 재촉했다.
“은혜가 큽니다. 감사합니다.”
옷깃을 여미며 인사를 한 그녀는 허둥지둥 그곳을 벗어났다. 어쩌면 이런 일을 당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정말로 험한 꼴을 당하고 보니 마을로 내려가서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죽을 때까지 천동이 만들어 놓은 동굴집에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이 전란이 끝나고 백성들이 제정신을 차려서 다시 옛날처럼 아녀자들이 마음 놓고 밤길이나 산길을 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이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언제인지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천동에게 기대어 살아야 하기에 그녀는 답답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양반인 자신이 천한 신분의 백정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구차하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의 상황은 분명히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맞는데, 그럴 용기도 없고 무엇보다 죽는다는 것이 두려웠다. 지아비가 죽으면 자진을 해서 따라죽는 여인들이 새삼스레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친정에서 모친에게 아녀자의 도리에 대해서 많은 교육을 받았고, 그런 상황이 되면 자신도 명예롭게 그 길을 택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도 목숨 하나 끊지 못하고 이렇게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게 될 줄은 몰랐다.
‘사는 게 치욕스러운데도 죽기는 정말 두렵다.’
한편 고니시의 군영 내로 점점 깊숙이 들어가는 천동의 마음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렇지만 두렵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안내하는 군졸을 따라서 한참을 걷고서야 대장 깃발이 휘날리는 군막 앞에 멈추었다. 세평이 말하던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
“네.”
천동은 언제나처럼 짧게 대답했다. 잠시 기다리니 세평이 다시 나와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고니시의 군막 안에 부장과 시녀 등 십여 명이 고니시의 주위에서 도열해 있었다. 부장들의 모습은 언제든지 발검이 가능한 자세였다. 이들이 한꺼번에 자신을 공격한다면 순식간에 자신의 육체는 갈기갈기 찢길 것이 자명했다. 홍의장군의 군막에서보다 수십 배 더 긴장이 되었다. 손에서는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인사드리거라. 저분이 고니시 장군님이시다.”
“천한 백성이 인사드리옵니다. 양가 천동이라고 합니다.”
고니시는 천동을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며 살폈다. 그의 눈에 비쳐진 천동은 세평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의 눈앞에 서있는 아이는 기골이 장대하여 왜국에서도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재였기 때문이다.
글 : 지선환
저작권자 © 울산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