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으로 건너온 왜군 14만5000명은 남해의 해안 쪽에 왜성을 쌓고 하삼도 점령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들은 6월까지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임진년의 출병과는 달리 식량의 현지조달을 목표로 세운 왜군들의 하삼도의 농민들에게 씨앗을 파종하고 가꿀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한 전략도 숨어 있었다. 안달이 난 것은 오히려 조선군 진영이었다. 도원수 권율은 적병들이 몇 달째 남해의 성안에 틀어박혀서 움직이지 않자 원균에게 명하여 부산진을 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수군통제사 원균은 그의 성격과는 달리 쉽게 함대를 움직이지 못했다.
육전과는 달리 바다는 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원균도 이제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는 이순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통제사 이순신이 소심한 겁쟁이라고 장계를 올렸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바다의 모든 상황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최대한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이끌어 불패의 전승기록을 남긴 이순신의 존재가 점점 더 거대하게 다가왔다. 원균은 바다에 대한 배움을 게을리 하여 지난 몇 달의 시간을 술이나 마시며 허송세월한 것이 몹시 후회스러웠다.
함대를 움직일 전술을 구상하지 못한 원균이 차일피일 시간을 끌자 도원수 권율은 그의 출병을 재차 촉구하였다. 마침내 1597년 6월 18일(음력)에 원균은 함선을 이끌고 안골포와 가덕도를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조선 수군 최초의 패배였다. 이에 화가 난 도원수 권율은 원균을 군영으로 불러서 곤장을 치며 재차 출병을 독려했다.
원균은 다시 함선 200척을 이끌고 출동해서 7월4일 절영도에 도착했다. 적선은 조선 수군을 유인했고 조선 수군은 다시 패했다. 그리고 7월14일에 칠전량까지 쫓아온 왜의 수군에 의해서 조선 수군은 처절하게 궤멸되었다. 칠전량 해전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도망하였으며, 그것이 후일 이순신에 의한 수군 재건의 토대가 되었다. 동양 최강을 자랑하던 조선의 수군은 기량이 떨어지는 지휘관 원균과 무리하게 출전을 독려한 도원수 권율로 인해서 누가 봐도 재건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참담하게 패하였다.
해전에서의 대승으로 자신감을 찾은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왜군들은 사망한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일일이 잘라서 소금에 절인 후에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여세를 몰아서 가토 기요마사는 삼만의 병력으로 화왕산성을 공격하려고 성을 포위했으나 총사령관이 유격전에 능한 홍의장군 곽재우인 것을 알고 그곳을 우회하여 초계 합천을 지나 황석산성으로 진격하였다.
황석산성은 백제가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만든 국경성으로 안음현·거창현·함양현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의 둘레가 사천 보는 되는 제법 규모가 큰 성이다.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성곽의 둘레가 험난한 지형으로 되어 있어서 능히 일당백의 싸움이 가능한 곳이라는 점이다.
글 : 지선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