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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일보
  • 승인 2020.10.1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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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식 울산시교육감 비서실장

‘공자 가라사대’로 시작하는 논어는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가꾸어왔다. 웬만한 참고서 한 권 분량도 안되는 고전이 이토록 오랫동안 인용되고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화석처럼 굳어 글자 하나 변하지 않는 ‘텍스트’가 무려 2000년 넘도록 우리에게 ‘펄떡거리는 영감’을 주는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때로 짜증나는’ 말이 왜 논어의 가장 첫머리에 자리 잡았을까?

최근 전교조는 대법원의 판결로 다시 합법노조의 지위를 되찾았다. 물론 하급심 판결은 달랐다. 그러나 정부와 전교조가 소송을 통해 다툰 사안은 1심부터 대법원 판결까지 동일했다. 해고자를 조합원으로 인정한 전교조 규약을 시정하라는 정부의 명령이 있었고 이를 거부한 전교조를 노동조합으로 보지 않는다는 행정 행위를 두고 벌어진 소송이었다. 사회적 이념 갈등의 최전선이라고 평가받는 소송에서 ‘같은 법을 갖고 다른 판결’이 나온 것이다.

요즘 울산 교육계에 예년에 보기 어려운 ‘조례 제정’ 열풍이 번지고 있다. 민주적 절차를 공고히 하고 주민들의 교육 요구를 제도화 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좀 더 지역 여건에 맞는 조례로 변화 발전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의정 성과로 남을 것이다. 보통 조례나 법률에는 ‘∼할 수 있다’는 문구가 많다. 할 수 있다는 말은 ‘안 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있으나 마나 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조문을 대하는 각자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혹자는 ‘안 할 수도 있다’고 판단할 것이고, 혹자는 이 조문을 근거로 ‘안 하고자 하는 세력’에 맞서 싸우기도 할 것이다.

활자 그 자체로는 생명력이 없다. 2500년 전 공자가 ‘열심히 배우고 복습하라’고 가르치진 않았을 것이다. 종이도 칠판도 없던 시절에 가르침을 필기하고 집에 가서 다시 외웠을 공자의 제자들이 있었겠는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익히는’ 것이 무엇인지 ‘입에 거품 물고’ 논쟁해 온 덕에 아직 쓸모있는 경구로 우리에게 남아있는지 모를 일이다.

법은 어떤가? 툭하면 법과 원칙을 들이대지만 불과 몇 백 년 전만해도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돌지 않았던가?’ 판사가 바뀌면 판결이 바뀌는 일은 지금도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때론 빵 한 조각이 마약보다 더 큰 죄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법 조문 역시 활자로만 바라보면 눈물도 영혼도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법은 단지 핑계나 불성실의 두툼한 갑옷일 뿐이다.

‘근거가 없어서 안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아니 요즘은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안되는 이유를 찾는 것은 쉽다. 법이 없고 전례가 없고 예산이 없다. 그리고 타지역에서 하는 곳이 한 곳도 없다. 이쯤되면 법치국가에서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는 새로운 일이 생기고 그것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행정력이 발휘된다. 물론 동일한 상황을 두고 또 다른 기관에서는 주민들의 성난 돌팔매를 맞기도 한다. 차이는 뭘까?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는 요즘, 안된다던 일이 일정한 논의를 거치고 나서 현실화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근거를 바꾸어서 되는 일도 있고, 다른 관점에서 근거를 찾은 일도 있다. 다른 기관과의 협치를 통해 이룬 것도 있고 상위 기관을 움직여서 이룬 일도 있다. 이것은 모두 적극행정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세련되지 못했지만 분권화된 자율적 판단과 자치 능력이 조금씩 발현된 결과라고 본다. 전례없는 상황이니 법이 없고 관례도 없지만 이렇게 만들어 가는 일이 전례가 되고 메뉴얼이 되고 나아가 법이 될 것이다. ‘할 수 있다’라는 조문을 ‘해 보겠다’는 근거로 삼고, 활자가 아닌 법의 취지를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는 태도를 갖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무(公務)’를 수행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용식 울산시교육감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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