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형적 묘사 치중돼 공감대 잃어
변별력 있는 작품 생명력 커질듯

서예사를 보면 왕조나 시대적 상황에 다양한 사조가 있지만 역사 속의 이야기이며, 추사 선생 이후 미술사적, 서예사적 변화를 주도하는 서예가는 없었다.
서예술의 생명성은 전통의 계승, 시대정신의 발현,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다.
서예는 동북아시아의 문자를 매개체로 발전한 특유의 예술이며, 문학·회화와 더불어 또는 그들 예술과 서로 융합하면서 오랫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과거에 찬란한 예술의 주역이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사람들은 서예를 어려워할까? 작품활동을 하는 많은 작가들도 장르가 다른 서로의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만 서예전시장만 들어서면 어렵다, 모르겠다, 라며 서예를 외면하는 풍토도 있다. 또한 젊은 세대가 서예를 통해 느끼는 이미지는 무겁고 어렵고 배울 현실적 가치가 있겠느냐는 부정적 시선도 존재한다.
서예와 다른 예술의 차이점은 문자를 사용하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만인의 예술로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적이며 폭발적일 수 있는 서예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은 왜일까?
여전히 서예작품은 몇 천, 몇 백년전의 금석문 등 전문가도 판독하기 힘든 고전적 자료를 텍스트로 목적성에 따른 자료의 분류 없이 오랜기간 학습의 결과가 작품이 된다는 것이 서예계 내부의 주류적 시선이다. 개성있는 작품을 선호하기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기교를 후하게 평가하는 분위기라서 다양한 작품이 발표되기 어렵다.
서체 또한 여러 가지 서체를 다루는 것이 서예가의 역량으로 인식되고, 장문의 서사를 하며 속된 것을 경계하고, 고졸미를 서예미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서예작품은 시(詩), 사(詞), 격언(格言), 명구(名區) 등 문장의 내용과는 구분되는 별개의 장르이며, 문장에 담겨진 내용이 서예미와 필연적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서예작품은 문자와 비문자의 논란에서 더욱 치열해야 한다. 회화·조각·디자인·사진 등 인접예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담론을 세대와 특정기호에 맞추어 조형어법 속에 담아야 할 것이다.
문자의 기능이 약화된 한문문장의 외형적 묘사에만 치중된 서예작품이 한글이나 이모티콘을 날리고 소비하는 세대에게 어떤 공감대를 이끌 수 있을까? 문자를 매개체로 발전한 예술이라는 특성으로 가장 대중적일 수 있는 예술이 한자 그것도 전서·예서·행서·초서등의 서체가 글씨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 되고,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작품들도 대부분이라는 것이 예술향유자들의 시선이다.
한자에서 한글세대로 바뀌었고, 영어가 한자보다 익숙한 시대가 됐다. 문자를 쓰던 시대에서 자판을 찍고 날리는 시대로 변했다. 두, 세글자로 압축되는 키워드에 익숙한 세대에 압축적으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서예술은 문화의 주축으로 위상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서예작품을 좋게 말해서 재현적 예술이라 하지만 미술은 19세기 이후 산업화와 사회의 급진적인 발달에 의해 미술이 지닌 사상 또한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 사진의 발명 이후 사실주의가 발달했고, 감정을 표현하는 인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에 최근에는 평면예술의 생명력에 의문을 품는 이도 있다. 입체·영상·설치가 현대미술의 주류를 선도한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으며 예술과 비예술의 간극마저 애매모호한 현실이다.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온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산물이 문화다. 교양문화, 변화의 문화, 상징체계,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 등 문화를 구분하는 것은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IT 시대에 문화는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전근대, 현대의 한국 문화는 다르며 세대간의 의식 차이도 확연히 차이가 있다.
전체의 목적에 구성원을 도구로 생각하던 시대는 지나갔고, 목표와 목적을 통해 사람들은 생각하는대로 주체적으로 움직인다. 개성과 각자의 목소리를 주장하는 시대에서 변별력 있고 서예가마다 개성있는 작품은 생명력이 커질것이며, 서예계 생태계가 건전해 질 것이라 생각해 본다.
김봉석 울산미술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