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자손자변, 최선과 차악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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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자손자변, 최선과 차악 사이
  • 경상일보
  • 승인 2021.08.0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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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희 미국변호사

개인 또는 기업은 사업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거래를 규율하는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일정한 권리와 의무를 부담한다. 계약의 원활한 이행을 담보하기 위해서 당사자들은 여러 장치를 계약 내에 두게 되는데,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계약위반으로 인한 손해의 분담(civil remedy, damage)을 미리 규정하는 것이다.

손해의 분담, 즉 계약이 의도한 대로 이행되지 않아 발생한 손해를 누구에게 어느 범위까지 부담하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많은 가치판단을 요하나, 그 계약위반에 귀책사유 있는 당사자에게 인과관계 있는 손해를 배상하도록 하는 과실책임의 원칙(fault-based liability)에 기하는 것이 통상적일 것이다.

그런데 거래에 따라서는 이 원칙에 의한 손해 분담이 계약목적의 달성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항만예선사업 관련 예인계약 또는 해양플랜트사업 관련 용선계약이 그 실제 사례인데, 이 계약들에 있어서는 과실책임이 아닌 자손자변(自損自辨, Knock-for-knock indemnity)이 손해배상을 규율하는 새로운 법리가 된다.

계약상 자손자변 조항은 과실 유무에 관계없이 각 당사자가 자신에게 발생한 손해를 감수하고 상대방을 면책시켜 주겠다는 위험 분담에의 합의이다. 시비를 가려 상대방에게 완전배상의 책임을 묻는 대신 자신이 손해를 감수하게 하는 이러한 법리는 얼핏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해 보이는데, 뜻밖에도 자동차보험회사들, 공동운항 컨테이너 선사들, 그리고 해상 석유·가스산업에 참여하는 기업들 간에 이미 전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표준화된 거래조건이다.

그렇다면 이들 산업은 왜 기존의 원칙을 대신해 자손자변을 손해의 분담을 규율하는 계약상 법리로서 받아들인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법리를 채택한 거래가 사용되는 산업의 특수성에서 찾을 수 있다.

자손자변 조항이 가장 널리 사용되는 분야인 해상 석유·가스산업은, 에너지자원에 대한 탐사, 시추, 생산, 운송 및 저장 등과 관련한 플랜트 시설과 장비의 설계, 제작, 운용, 유지·보수 및 해체를 망라하는 등 매우 넓은 범위의 연관 산업을 아우른다.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참여기업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용선, 조달, 서비스 제공 등 관련 계약을 이행하게 되는데, 이들 계약은 형식적으로 별개의 법률관계를 구성하나 실제로는 연쇄적이고 상호적인 작업 고리들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그 이행의 성패가 독립적이지 않다.

만일 이러한 거래관계의 특수성을 간과한 채 과실책임에 기해 손해의 분담을 도모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각 참여기업들은 중첩된 작업일정 속에서 상대방의 과실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비용과 부담을 감수해야 하고, 그 결과 계약위반의 책임을 부담하는 기업은 예견가능성이나 상당인과관계로서 손해배상의 범위를 자신이 감수할 수 있는 책임범위 내로 한정할 수 없어 파산할 수도 있는 위험에 노출된다. 이러한 불확실하며 통제되지 않는 계약상 위험은 목적사업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게 되기에 이를 수정할 필요에 따라 구상된 것이 바로 자손자변 조항인 것이다. 2016년 영국 항소법원의 판례(Transocean Drilling UK Ltd v Providence Resources plc, EWCA Civ 372)에서 재판부가 시추선 선사인 원고의 귀책사유에도 불구하고 관련계약상 자손자변 조항에 따른 면책을 인정한 것 역시, 거래에 수반한 위험을 총합적으로 고려·판단하여 자신이 부담하고 상대방에 구상(求償)하지 않겠다는 고도로 세련된 위험분담의 합의에 대한 존중이라 평가할 수 있다.

거래당사자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손실을 최소화하며 이를 위해 계약상 위험을 타방 당사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손해의 전보(塡補)라는 최선을 위한 합리적인 노력이다. 그러나 쌍무계약상 급부에 수반한 위험을 일방에게 전담시키는 데 매몰될 경우 사업 전반에 본질상 내재한 위험을 안정화시키지 못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함께 유의해야 한다.

이준희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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