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4주년 3·1절을 앞두고 3·1운동 당시 병영 지역 비밀청년회가 학도가 곡조에 붙인 독립운동가 노래를 부르던 이상천(71)씨가 감정에 북받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이씨는 병영 3·1만세운동 독립운동가 고 이종룡씨의 손자다. 이씨는 37세까지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그래서 할아버지로부터 병영 3·1만세운동 당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이씨의 기억속에 남은 104년이 지난 당시를 회고했다.
1919년 4월4일 오전 9시 경남 울산군 하상면 병영리 일신학교 교정(병영초등학교)에서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다. 병영 3·1만세운동은 울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이어졌다.
당시 병영 출신 서울 유학생이 고향에 내려와 3·1독립 만세 운동 열기와 분위기를 전했다. 비밀청년회 간부 이현우, 이종근, 이종룡 등은 ‘결사보국’을 혈서로 작성해 독립운동 준비에 나섰다. 준비는 일제의 눈을 피해 한달여간 야학에서 진행됐다.
이씨의 할아버지인 이종룡 독립운동가는 독립선언서 200매, 태극기 500매를 제작해 4·4 병영 독립만세운동 당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맡았다.
4월4일 병역 지역에 울려퍼진 ‘대한 독립 만세’ 소리에 인근에 있던 일본 경찰들이 달려와 총으로 위협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20세였던 이종룡 독립운동가도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연행됐다. 다음날인 5일과 6일, 만세운동은 “잡혀간 동기를 석방하라”며 열린 주민궐기대회로 이어졌다. 일본 경찰이 강력 제지에도 주민들의 반발이 계속돼 시내에 있던 경찰까지 더해 발포하며 진압에 나섰다.
이때 4명이 순국하고 10여명이 추가로 경찰서로 연행됐다. 이들은 모두 20~23세 사이의 어린 청년들이었다.
동생이 걱정돼 나섰던 이종룡씨의 형 당시 23세의 이종근씨도 포함됐다.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장생포로 끌려갔다. 여기서 배를 타고 부산형무소로 이동해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주동자급은 다시 대구형무소로 이동해 1년6개월~2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이종룡씨는 6개월, 형 이종근씨는 2년형을 받았다. 이들의 죄목은 모두 보안법 위반이었다.
당시 감옥에서의 고초는 말로 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멸시와 폭력으로 얼룩진 감옥생활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삶이 편하진 않았다.
이씨는 “집 바로 뒤가 병영파출소라 낮이고 밤이고 비명소리에 말 안듣는 주민들을 거꾸로 매달아 취조하고 고문하는 일이 매일 이어졌다고 한다”면서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때 할아버지가 불러주셨던 당시 3·1 독립운동가가 잊히질 않는다”며 울먹였다.
이씨의 부친은 삼일사 유족회 3대 회장을 지냈고 큰아버지도 4대 회장을 맡아 평생을 독립운동사 알리기에 기여했다. 모두 울산지역의 독립운동가에 애국지사 서훈을 받고 관련 내용 알리기에 앞장섰다.
현재 이씨는 기초수급자로 나라의 도움을 받아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매국노들은 잘 살아도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잘 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늘 당당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독립운동가 선조의 공적을 후손들이 증명해야했었던 점이다. 후손들을 계속해서 재조명해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를 오래도록 기억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밝혔다.
강민형기자 min007@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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