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42)]저 높은 곳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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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여행과 건축, 그리고 문화(42)]저 높은 곳을 향하여
  • 경상일보
  • 승인 2020.02.13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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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5)
▲ 그리스 수도원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메테오라(Meteora). 기묘한 지형과 더불어 극단적인 고립과 은둔의 수도생활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기암절벽 비경과 어우러진 마테오라
세계 최고의 수도원군락으로 꼽을만
험난한 고립의 땅에 성소 지은 이들은
이민족 지배로 무기력한 그리스 피해
현실 초월한 성스러운 세계 꿈꿨을 듯


로마의 그리스 정복과 함께 그리스 신들은 그리스인들의 마음에서 떠나기 시작했다. 신화 속의 신들은 로마식 이름으로 바뀌어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지만 더 이상 그리스인들과 도시국가를 지켜주지 못했다. 절망과 회의에 빠진 그리스인들에게 예수의 복음은 새로운 희망이었을 터. 사도들의 전도와 초대교회가 그리스에 집중되었다는 것이 이해될 만하다. 필리포, 데살로니카, 아테네와 고린도에 초기 교회가 세워진 사도시대로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비잔틴 제국 시대에 이르러 그리스는 빠르게 동방교회의 중요한 거점이 되어 갔다.

오늘날 그리스에서는 연륜이 오래된 그리스 정교회의 교회와 수도원들이 남아있다. 교리 상으로는 로마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비잔틴 특유의 독특한 신비감을 체험할 수 있는 건축이다. 바위투성이의 척박한 시골마을에서 볼 수 있는 돔 지붕의 작은 교회들, 흰 수염과 검은 수단을 길게 걸친 사제들의 느릿한 발걸음, 분향냄새가 가득한 어두운 성당에서 울리는 나지막한 기도소리, 그리스에서는 교회보다 수도원이 더 어울린다.

▲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그리스 수도원의 절정은 메테오라(Meteora)에 있다. 소름이 돋을 만큼 기묘한 지형과 더불어 극단적인 고립과 은둔의 수도생활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가히 세계최고의 수도원 군이기 때문이다. 메테오라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거의 칼람바카 마을에서 하루를 묵는다. 마을 뒷산이 기암 괴봉의 절경을 이루니 호텔방들은 저마다 그 경관을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사암과 역암으로 이루어진 절벽과 고봉들이 계림산수처럼 어이상실할만한 절경을 만들었다. 수백 만 년 동안 풍화작용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 그것은 인간이 흉내 내기 어려운 거대한 자연의 걸작이다.

봉우리들은 거대한 탑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그 정상은 하늘세계와 가까워지기에 성스러운 공간이 된다. 그러나 깎아지른 절벽으로 세워진 수직의 봉우리들은 인간의 접근을 불허한다. 세상을 피하여 숨어살려는 사람들이 아니면 이곳에 거처할 필요가 없다. ‘머털도사’의 수도처처럼 수도자들에게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이곳에 본격적으로 수도원이 건축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정도로 알려진다. 투르크 족이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면서 수도자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이슬람세력의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파괴하지도 내쫓지도 않았다. 메테오라는 오히려 강력하고 부유한 수도원으로 발전했고 지속적으로 숫자가 증가하여 16세기에는 20여 개가 넘는 군락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 통치시기에 동방정교의 전통이 보존되고 발전될 수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메테오라의 설봉들은 또 다른 장관을 연출한다. 각양각색의 설봉들이 엮어져 만든 자연경관의 경이로움만이 아니다. 기암 괴봉 위에 자리 잡은 수도원들은 나무 위의 새집처럼 구분되지 않는 물아일체의 절경을 만든다. 건물 한 동이 올라앉은 형식으로부터, 성벽처럼 쌓아 만든 성채형, 그리고 성채 안에 많은 건물이 도시조직을 이룬 성곽도시형에 이르기까지 규모도 형상도 제각각이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크다는 메테오른 수도원(Monastery of Great Meteoron)으로 들어선다. 절벽으로 기어오르지 않아도 출입할 수 있지만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해자를 건너는 것처럼 협곡사이의 작은 길을 통과해야 입구에 도달한다. 바위를 파서 작은 입구를 만들고 좁은 계단을 여러 번 구부려 길을 냈다. 계단 옆에도 돌 벽을 쌓아 밖에서는 길이 노출되지 않도록 한 것도 방어적이다.

수도원의 구성은 중세유럽의 성곽도시와 다를 바가 없다. 교회를 중심으로 수도자들의 거주공간과 부속건물들이 밀집되어 골목으로 연결된다. 좁은 대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조건이 도시를 보다 응축시킨 모습을 갖는다. 내부가 다소 좁고 답답해 보이기는 하지만 밖으로 향한 조망은 시원하다 못해 광활하다. 마테오라 연봉으로 이루어진 협곡들 아래로 칼람바카 마을이 장난감 나라처럼 내려다보인다.

수도원은 로프로 된 그물을 늘어뜨리고 접을 수 있는 나무 사다리를 이용해야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007영화에서처럼 도르래를 이용한 리프트로 물건을 오르내렸다. 각각의 수도원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저마다 재산과 농작물, 양이나 염소 떼 등을 관리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 험난한 지형을 드나들며 어떻게 농사를 지었고, 어떻게 물을 공급했고, 오수와 배설물은 또 어떻게 처리했을까? 이토록 어려운 생활방식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장소에 수도원을 지으려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 깊은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곳이 은둔과 고립의 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들은 무엇을 피해 이곳에 숨었을까? 그들이 피하고자 했던 것은 종교가 다른 적이 아니라, 무기력한 그리스 사회가 아니었을까. 이민족의 지배 속에서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했던 그들이 기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느님. 그들은 현실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는 성스러운 세계를 꿈꾸었으리라.

어쩌면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점하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높은 곳이란 밑에서는 우러러보는 곳이며, 위에서는 내려다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높이는 권위에 비례한다. 메테오라는 신과 가까운 장소인 동시에 신의 눈으로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스카이 캐슬, 높은 곳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은 시대를 초월한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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