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시각]늘봄학교의 부실한 조립설명서
상태바
[현장의 시각]늘봄학교의 부실한 조립설명서
  • 석현주 기자
  • 승인 2024.03.11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석현주 사회문화부 차장

최근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프라모델 조립에 푹 빠졌다. 프라모델이란 플라스틱+모형(모델)의 합성어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조립식 모형을 뜻한다. 프라모델은 상당히 정교한 물건이고, 조립을 진행하는 과정에 많은 의미들을 담고 있다. 그만큼 조립 설명서에 따라 확실한 단계를 밟아야 비로소 완성체가 된다.

그런데 이제 막 8살이 된 고사리손에 정교함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을까. 설명서를 꼼꼼히 살피지 않고 억지로 부품을 끼워 맞추고, 로봇 모형을 빨리 완성해내기 위해 투명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였다. 아들의 프라모델은 얼마가지 않아 무너져 내렸고,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첫 단계부터 다시 조립해야 했다.

빨리 완성 로봇을 만나고 싶은 어린이 만큼이나 최근 교육정책을 펴내는 어른들의 마음도 조급해 보인다.

특히 이달부터 초등 ‘늘봄학교’가 시행됐는데 현장 곳곳에서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정책 집행에 있어 ‘속도’를 강조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뜻이 반영되면서 충분한 시범 운영이나 평가의 시간을 갖기보단 ‘속전속결’로 정책이 실행됐기 때문이다.

전담 인력을 확보했는지가 늘봄의 ‘질’을 좌우하는데, 대부분의 학교가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결국 울산의 한 초등학교는 해당 인력을 구하기 위해 ‘시급 1만원’을 걸고 자원봉사자를 구하기도 했다.

해당 정책의 성패는 안전한 돌봄과 내실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제대로 갖춘 학교는 찾아보기 힘들다. 늘봄학교 시범학교가 내놓은 프로그램을 보면 늘 해오던 돌봄교실의 판박이다. 학교 정규수업을 일찌감치 마친 아이는 돌봄교실로 이동해 교사들의 지도를 받지만, 양질의 교육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공간 문제도 걱정이다. 교실은 실내화를 신고 있어야 하는 데다, 춥고 좁아 아이들이 늦은 시간까지 편안하게 머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단언컨대 어떤 부모도 8살 아이를 이런 곳에 12시간 방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공공이 주는 신뢰가 있겠지만, 급조한 인력과 프로그램으로 교육 정책이 추진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질 좋은 교육을 찾아 사교육 현장을 헤매는 교육 현실을 생각한다면 공공이 주는 강점도 희석될 수밖에 없다. 경쟁 강요 사회에서 부모들은 사교육비에 허리가 휘청이더라도 비용이 덜 드는 늘봄학교 대신 학원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내 아이만 뒤처질 수 없다는 경쟁 심리가 교육에도 작용하면서 학부모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차선책을 택하고 있다.

늘봄학교가 ‘국가돌봄체계’의 첫 단추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 없이 ‘속도전’을 펼치니 총선용 졸속 추진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보다 섬세한 보완작업이 필요하다.

늘봄학교가 국가돌봄체계의 핵심이 되기 위해서는 학부모와 아이의 마음부터 헤아려야 할 것이다. 단순히 돌봄의 시간을 늘리고, 교사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고 이 사태가 해결되진 않을 것이다.

8살 아들의 프라모델처럼 무너져 내리기 전에 원점으로 돌아가 재검토하길 바란다. 아이가 즐겁게 방과 후를 보내고, 이를 본 학부모가 늘봄학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돌봄의 질을 높일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석현주 사회문화부 차장hyunju021@ksilbo.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울산 곳곳 버려진 차량에 예산·행정 낭비
  • [지역민도 찾지 않는 울산의 역사·문화명소]울산 유일 보물 지정 불상인데…
  • 확 풀린 GB규제…울산 수혜 기대감
  • 궂은 날씨에도 울산 곳곳 꽃놀이 인파
  • [기고]울산의 랜드마크!
  • 이재명 대표에서 달려든 남성, 사복경찰에게 제압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