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문답]하늘에서 은하가 떨어지는듯, 푸른빛 웅덩이엔 용이 숨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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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문답]하늘에서 은하가 떨어지는듯, 푸른빛 웅덩이엔 용이 숨은듯
  • 김창식
  • 승인 2024.05.0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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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의 거문산과 옥녀봉 사이로 흐르는 웅천천 계곡에 있는 홍연폭포.
▲ 홍류동 계곡 인근에 위치한 남평문씨 문연정.
▲ 홍연폭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비.
▲ 송철호 인문고전평론가·어리버리산악회 회장
1.

지난해 여름에 일본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와 북알프스를 다녀온 적이 있다. 여행 이튿날 하쿠바 삼산으로 알려진 시로우마다케(2933m)·샤쿠시다케(2932m)·시로우마아리카다케(2933m)의 녹지 않은 눈을 볼 수 있는 이와다케(1289m)에 올랐었다. 이와다케 산 정상에 올랐을 때 나는 산 정상에서 소풍 온 것처럼 한가로움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가끔 책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숲길을 굳이 시간에 쫓기듯 빨리 걷지 않았고, 인증 사진을 찍으려고 서두르는 사람들도, 올라오자마자 바로 내려가려는 사람들도 없었다. 산에서 음료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이 편안하게 보였다. 내가 뜬금없이 일본의 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상에서 본 풍경들 때문이다. 23년간 산악회 회장을 한 나는 이래저래 많은 산을 다녔다. 그런데 갈 때마다 아쉬웠던 점은 산 정상에 오르면 대체로 사진을 찍고 바로 하산하는 것이다. 마치 산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등산의 목적인 것처럼…. 애써 올라왔는데 산 정상의 풍경을 느긋하게 즐길 틈도 없이 그냥 내려가니 나는 늘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산을 오르고 내릴 때의 대화도 대체로 몇 개의 산에 가봤다든가 얼마나 빨리 올랐다는 이야기가 많다. 대화 중에는 ‘정복’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산행의 묘미는 정상에 올라서 탁 트인 자연과 세상을 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꼭 정상에 올라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 가고 싶은 만큼 가고 머무르고 싶은 만큼 머무르고, 산이 가져다주는 시원함이나 맑음 속에서 한가로운 행복을 느끼면 된다. 산을 많이 다닌 사람들도 산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그저 앞서가는 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가다가 정상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는 빠르게 하산하기 때문이다. 넓고도 큰 산에서 정상은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일 뿐인데 말이다. 꼭 높은 산이 좋은 것만도 아니다. 한걸음에 오를 수 있는 앞산 뒷산도 오를 때마다 새로움이 느껴진다. 보지 못한 것을 봐서 새롭기도 하고 내 마음이 달라져서 새롭기도 하고, 계절이 다르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와서, 아니면 밤과 낮으로 새롭기도 하다. 내 마음이 닫혀 있으면 늘 그 풍경이지만 내 마음이 열려있으면 볼 때마다 다른 풍경이다.



2.

우리가 흔히 지나쳐서 잘 모르지만, 부산 기장에도 폭포가 있다. 기장 8경 중 5경이라고 하는 홍연폭포가 그것이다. 홍연폭포는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의 거문산과 옥녀봉 사이로 흐르는 웅천천 계곡에 있다. 폭포를 형성하는 하천은 거문산과 문래봉에서 발원하여 해발 120m에서 합류하여 철마천의 상류를 이루고, 해발 50m 부근에서 폭포를 만들어낸다. 폭포의 높이는 평상시를 기준으로 하면 상단이 5m, 중단이 20m가량이며, 중단에서 낙하한 물이 수직에 가까운 반석 위를 100m 정도 흘러 홍류동 저수지로 모인다. 철마에서 정관으로 가는 곰내터널 입구에서 내리면 가까운 거리에 있다. 폭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수도암이 있고, 아홉산 숲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홍연폭포에는 홍연폭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비가 있다. 1894년 개화기 때 기장 현감으로 온 손경현의 한시와 1919년 철마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민용호의 한시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푸른빛 옥색 나는 맑은 웅덩이는 용이 숨어있는 것 같고 (碧玉登湫龍寃在) / 흰 구름 높이 머문 산마루에는 학이 날고 있는 모습이라 (白雲高頂鶴疑來)”, 손경현이 쓴 한시의 한 부분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894년(고종 31) 8월13일 기장 현감으로 임명되었다가, 1년 후인 1895년(고종 32) 11월8일 합천 군수에 임명되면서 교체되었다. 조선 후기 부산 기장 지역의 뛰어난 경치와 유적 등을 소재로 하여 지은 가사 문학 작품 <차성가(車城歌)>가 있는데, 여기에 홍연폭포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차성(車城)은 고려 때 기장의 별호이다. <차성가>는 모두 9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7단에서 ‘거문산과 옥녀봉 사이에 걸려 있는 홍연폭포는 구천에서 은하가 떨어지는 것 같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문용호의 한시에 “졸졸 흐르는 푸른 산골짜기 물은 골마다 울리고(碧澗潺湲鳴洞口) / 산뜻하고 깨끗한 홀로 있는 정자는 구름 가에 우뚝하네(孤亭蕭濾立雲邊”가 나온다. 홍연폭포에서 수도암으로 가는 비탈진 곳에 정자가 하나 있다. 문연정(文淵亭)이다. 정자 현판에 ‘崇禎五丙寅三月下澣 仁州張錫英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이다. 숭정은 1628년부터 1644년까지 17년간 사용했다. 이후는 청나라 연호를 사용했다. 그런데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나 인물들은 청나라 연호를 거부했다.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청나라 연호를 사용해야 했지만, 반청 사상이 강한 유학자들이 문서나 비석 등에 여전히 숭정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는 여전히 명나라를 받들겠다는 표현. 18세기 후반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쓸 적에 청나라 연호를 썼다고 욕을 먹었음을 보면, 이 시기만 해도 청나라 연호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 유학자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崇禎五丙寅三月下澣 仁州張錫英記’에서 ‘오’(五)는 다섯 번째를 뜻한다. 그러니 ‘崇禎五丙寅’이라는 것은 숭정 이후 5번째 병인년이라는 말이다. 1626년이 병인년이니 이로부터 5번째 병인년은 1926년이다. ‘下澣’에서 ‘한’(澣)은 열흘을 뜻한다. 따라서 ‘三月下澣’이라는 말은 3월 하순이라는 뜻이다. 인주(仁州)는 인동의 다른 이름이다. 인동은 경상북도 구미와 칠곡에 걸쳐있던 옛 고을의 이름이다. 흔히 인동 장씨라는 말에서 인동은 이 지역을 뜻하는 말이다. 인동 장씨들이 자신의 본인 인동을 높여 불러서 인주라고 한 것이다. 장석영은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 지방보상 회장으로 활약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전국 유림들의 독립청원서를 초안하고 성주 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그는 1928년에 별세했으니 1926년은 그가 죽기 2년 전이다. 문연정의 현판은 1926년 3월 말에 장석영이 쓴 글이다.



3.

산은 그렇다. 찾아오는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럴 만큼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그저 산꼭대기만 오르려고 한다. 그것도 정복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몇 개의 산을 정복했다느니 얼마나 빨리 정복했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 특유의 부질없는 경쟁심리, 순위를 매기고 상위 순위에 자리하고 싶은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산은 함께 하는 것이다. 물아일체라고 했다. 우리네 선조들은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그래서 나와 산이 물아일체가 되어 함께 행복하려고 했다. 다시 묻고 싶다. 우리는 왜 산을 찾는가? 산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우리는 산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송철호 인문고전평론가·어리버리산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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