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효의 구도 열정은 치열했고 탐구 능력은 탁월했던 것 같다. 울산 반고사에서 사미승으로 공부할 때 그는 문수산에 은거하던 고승 낭지에게 배운다. 낭지는 원효에게 터득한 내용을 책으로 써보라고 권유한다. 그리하여 원효가 저술한 것이 <초장관문>(初章觀文, 첫 단원을 이해하는 글)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 몸을 편안히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이론)이다. 각 1권으로 이루어진 두 저술은 현재 서명만 전해지지만 고려 전기까지는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천(義天)이 1090년에 지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미 시절부터 스승이 저술을 권할 정도로 원효의 탐구 태도와 역량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뜨거운 열정과 수승한 탐구력으로 진행된 원효의 구도 여정에는 두 가지 획기적 분기점이 있다. 하나는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혼인이고, 다른 하나는 당나라 유학길에서의 깨달음 체득이다. 원효는 정해진 스승 없이 필요한 스승을 찾아다니며 배운다. 배움에 기대어 책 읽고 성찰하고 수행하면서, 수준과 성취를 나날이 높여간다. 그런 그에게 당나라 유학의 의욕이 생겨난다.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玄奬 602-664)의 불서 번역으로 인한 동아시아 사상계의 변화가 그 계기였다. <송고승전> 「원효전」에 따르면, 원효가 의상(625-702)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던 애초의 동기는 현장의 번역으로 새롭게 유포되고 있는 신유식(新唯識) 사상을 현장으로부터 직접 배우고자 함이었다. 원효와 의상이 2차 유학길에 오른 해를 661년으로 본다면, 현장의 번역이 중국과 한반도 불교계에 미치는 영향이 한창일 때라는 점에서 <송고승전>의 기록은 사실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두 차례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다.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 말미에 무극(無極)이 첨가한 기록에서 인용하고 있는 ‘부석본비’(浮石本碑)에서는, 원효가 의상과 함께 입당을 시도한 1차 시기를 650년(진덕여왕 4년), 2차 시기를 661년(문무왕 1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의상의 활동연대를 비교적 정확히 전하고 있는 ‘부석본비’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의상과의 1차 입당 시도가 좌절된 이후 2차 입당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원효가 무덤 속에서의 경험을 계기로 크게 깨닫고 유학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나이 44세 때의 일이 된다.
원효가 거리에서 부르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으려네>라는 노래를 듣고, 요석궁에서 과부로 지내던 자신의 딸과 만나게 한 사람은 태종 무열왕이다(<삼국유사>). 그렇다면 원효와 요석의 만남은 무열왕이 왕위에 있었던 654년부터 660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고, 원효 나이 37세에서 43세에 해당한다. 44세 때인 661년에는 2차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였으므로, 혼인으로 환속한 일이 깨달음을 얻은 일보다 앞선다. 40세 전후에 혼인으로 환속했다가 곧 당나라 유학이라는 구도의 길에 다시 나섰고, 그 길에서 크게 깨달았던 것이 된다.
공자는 40대를 ‘불혹의 나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생애 가운데 40대는 ‘현혹되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술회로 보이지만, 이 말에는 ‘40대는 현혹되기 쉬운 나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누구나 40대에는 자신이 닦아온 기량이 숙성된다. 소위 전문가의 나이다. 체력도 왕성하고 기량도 숙성했기에 자신감이 넘쳐나는 시기다. 이 시기에는 자신감으로 의욕이 넘쳐나기에 이런저런 현혹 거리에 기웃거리기 쉽다. 그래서 자칫 본분의 길에서 벗어나기 쉽다. 세속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 원효의 구도 여정에서도 40대는 유사한 정황이었을 것이다. 원효의 노래는 넘치는 자신감에서 솟구친 인간적 열정이었고, 무열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한 셈이다.
원효는 출가 수행자로서 혼인한 일을 잘못이라 뉘우치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진다. 자신을 ‘보잘것없는 인간’(小性居士)이라 부르며 승복을 벗는다. 그러나 가정 꾸리기에 전념하는 재가자로도 살지 않는다. ‘출가자도 아니고 재가자도 아닌’(非僧非俗) 구도자. 그러나 누구보다 치열하게 탐구하는 구도자의 행보를 이어간다. 결혼 직후에 2차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것도 이 점을 입증한다. ‘출가자도 아니고 재가자도 아닌’(非僧非俗) 구도 행보는 오히려 그의 삶과 사상을 한 차원 높인 것으로 보인다. ‘성스러움(聖)과 속됨(俗) 둘 다에도 매이지 않아 둘 모두를 품어내는 차원의 삶과 사상’(不一而不二)으로 향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55세 때 행명사(行明寺)에서 <판비량론>(判批量論)을 저술하였고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면, 그의 거처는 주로 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혼인은 출가 수행자로서는 일탈이었지만, 구도의 길을 걷는 인간 원효에게는 허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혼인 경험이 없이 구도의 길을 걷던 그는, 인간과 사회 온갖 요소들이 응집된 혼인을 겪으면서 인생과 세상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가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었고, 원효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봉안하고 공경·사모하면서 지극한 슬픔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그토록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구도자의 삶을 치열하게 이어가면서도, 원효 나름의 방식으로 요석공주 및 아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가꾸어 갔을 가능성을 추정케 한다.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위대한 성자이자 우뚝한 사상가. 원효의 매력은 그래서 더욱 강렬하다.
글=박태원 울산대 철학과 명예교수·그림=권영태 화백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울산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