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만나는 문인화 산책]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의 축적된 내면을 옮겨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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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만나는 문인화 산책]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의 축적된 내면을 옮겨내는 것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4.05.20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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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어느 날 한 줄기 빛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다. 언뜻 바람이 사잇길로 황토를 몰고 코끝을 스쳐 가고, 금새 꽃망울을 터뜨릴 것만 같은 한 송이 장미가 미풍에 흔들리고 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사이를 읽어가는 것, 시간과 공간이 만나 빚어내는 생명의 순환은 또 얼마나 경이로운가?

“빛바랜 낡은 앨범이 책상 위에 펼쳐진다. 동상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던 날, 소년은 켜켜이 쌓인 붉은 장미 속으로 한 겹 한 겹 미로를 헤집고 들어가듯 숨죽여 가며 단발머리 소녀에게 다가간다. 이내 사진사의 찰칵 소리는 번갯불이 번쩍이는 소리였고,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움이 엄습한다. 이후 그리움의 날은 계속되었고, 등굣길 소녀를 기다리며 길가에 떨어진 돌을 무심히 발로 툭 건드리며 소녀와 함께 정문으로 들어간 시간은 기쁨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녀는 사라졌고, 내면에 오롯이 새겨진 기다림의 시간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장미는 아픔, 그리움, 기다림의 대상이다. 장미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사람과 사물 풍경과의 만남에서 그 내면을 깊이 응시하여 본질을 찾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화가에게 자신의 내면에 맞설 외면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자신의 내면과 외면은 단순한 공간 개념을 넘어서고 장미는 외부의 세계를 내면화하는 정신적 의미로서의 대상이 된다. 장미 가시에 찔린 외면의 상처는 치유되었지만, 내면의 여린 상처는 더욱 깊어만 간다. 그래서 나에게 장미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열의 꽃이 아니라, 내면에 켜켜이 쌓여있는 그리움과 아픔을 안고 있는 꽃이요, 장미의 가시는 자신의 내면을 방어하는 기제(機制)인지도 모른다.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는 <풀베개>에서 “보통의 그림은 느낌이 없어도 물체만 있으면 된다. 제2의 그림은 물체와 느낌이 양립하면 된다. 그러나 제3의 그림에 이르면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마음에 적합한 대상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대상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나온다고 해도 쉬이 완성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의 축적된 내면을 옮겨내는 것이다. 그러자면 우리는 관조하는 대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냥 외형만 담아낸다고 그림이 되는 것이 아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신시집>에서 “만일 내가 한 그루 나무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나 자신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을 정도로 하나의 나무를 표현하는데 이를 수 있게 될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뜻하는 바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신과 외물이 일체화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물의 본질적 의미를 체험하고 그런 체험을 시인은 언어화하고, 화가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가는 사물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즉 사물의 내부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변화과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장미를 사랑한 시인 릴케는 1926년 12월 자신을 찾아온 여인에게 장미꽃을 꺾어 주려다 장미 가시에 찔린 것이 화근이 되어 스위스 발몽에서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미는 릴케에게 있어서 언어로 그릴 수 없는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 하나의 표상이며 신비스러운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겹겹이 싸인 눈꺼풀들 속 익명의 잠이고 싶어라” 릴케의 묘비명에는 본인이 죽기 1년 전에 직접 썼고 그의 무덤 앞 묘비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일까? 만남이란 무엇이고 헤어짐은 무엇인가?

며칠 전 예술의전당에서 ‘베르나르 뷔페전’을 보았다. 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 1928-1999)가 젊은 시절에 그린 ‘광대’의 잔상이 남아 있다. 베르나르 뷔페는 말한다. “광대, 이것은 두려움이다. 그는 그의 얼굴에 그림을 그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추악함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 슬프구나!” 전시장을 나오는 마지막 방에는 붉은 장미꽃 한 송이가 놓여있다. 책상 위에는 뷔페의 글이 적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내 그림은 모든 단계를 관통하는 실과 같아서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다. 삶은 계속된다.” 그림이 가지고 있는 힘을 생각해 본다.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헤어진다는 것, 마치 잠시 내리는 비처럼….

글=김찬호 미술평론가·그림=이재영 문인화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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