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이면 비누 냄새가 난다.’로 시작하는 소설이 있다. 현실이 재미없이 느껴지던 사춘기 시절, 여학생이라면 한 번은 동경했을 법한 환상의 종합선물세트 같았던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첫 문장이다. 팽나무, 은행나무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정자나무로 꼽히는 느티나무 아래서 초록 바람을 읽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너른 그늘을 펼쳐 더위를 식혀주던 학교 운동장, 동제를 지내던 마을의 당집 혹은 어른들이 장기를 두거나 담소를 나누던 정자,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의 나무까지.
비 오는 주말, 울산에서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 북구 강동동 당사마을에 다녀왔다. 수령을 500년으로 추정하는 나무는 작은 당집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동에서 서로 비스듬하게 선 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신령한 느낌이었다. 꿈틀거리는 듯한 아름드리 둥치가 문무왕 수중왕릉에서 막 뛰어오른 용인 듯 생동감 있었다. 세월이 무색하도록 무성한 초록 이파리를 달고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듯했다.

둥치는 성인 남자의 키 정도에서 둘로 갈라졌다. 담장을 넘은 한쪽 가지가 팔을 뻗어 무언가 잡으려 하는 형상이다. 무게로 인해 둥치가 갈라지지 않도록 군데군데 줄당김으로 가지를 연결하고 아래쪽으로는 지지대를 세웠다. 푸른 이끼가 낀 둥치는 곳곳에 외과수술 자국이 있다. 염분에 취약한 수종임에도 불구하고 바닷가에서 이토록 오래 살아왔다니, 참으로 경이로운 생명력이다. 뿌리내린 자리에서 500년을 산다는 것은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잎을 틔우고 부피를 키우는 일만은 아니었으리라. 사람들은 나무를 향해 풍어와 마을의 평화를 빌었을 것이다. 태풍이라도 불어닥치는 날이면 고기잡이 떠난 가족의 무사귀환을 기도하기도 했을 것이다. 전쟁의 참혹함과 환경오염이나 개발로 인한 한바탕 파도도 훑고 가지 않았을까. 염원과 시련의 무두질에 단련되며 느티나무는 마을의 정령이 되었으리라.
초록이 흔들리는 수간마다 마을의 역사가 흐른다. 어떤 수호신이 저보다 더 든든할 수 있을까. 지켜낸 것보다 더 긴 시간을 마을과 함께할 당사마을의 할배나무는 아직 젊은, 느티나무다.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