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퇴근길에 우연히 시골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울산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지만 평소 잘 보지 못했던 친구다. 안부를 주고받고 동시에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하고 전화를 끊었다.
‘밥’이라는 말처럼 일상에서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말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일을 잘 해내면 “이번에 밥값 제대로 했어”하고, 일이 잘못되면 “그렇게 하고도 밥이 넘어가”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세상 사는 재미가 없으면 “요즈음 밥맛이 없다”고 하고, 직장에서 잘리면 “밥줄이 떨어졌다”고도 한다.
2003년 개봉한 살인의 추억을 보면 주인공인 송강호 형사가 살인 용의자인 박해일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대사가 나온다. ‘사람을 죽이고도 밥이 넘어 가느냐’라는 역설적인 대사이다. 이 대사의 영어 자막이 “Did you get up early in the morning” 직역하자면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났어’라는 뜻이다. 즉 밥을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고,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죽었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밥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라는 말이 있다. 쌀밥이 삶을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점점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은 과거처럼 쌀밥은 많이 먹지 않는다. 과거 1970년대엔 쌀밥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쌀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기며, 쌀밥은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쌀밥이 뒷전으로 밀려난 느낌이다. 쌀이 넘쳐나 남아돌고 있는 데도, 하루에 채 밥 한 그릇을 먹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은 현실이다.
우리 국민이 평균적으로 하루에 먹는 밥은 두 공기가 안 된다고 한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22년 우리나라 국민 1인당 하루 평균 쌀 소비량이 155.5g으로 역대 최소를 기록했다. 밥 한공기에 쌀이 100g 정도 들어가는 점을 감안하면 하루 밥 한 공기 반 정도를 먹는데 그쳤다는 의미다. 이는 식당 등에서 소비하는 것도 포함한 소비량이며 이처럼 밥을 잘 안 먹으니 쌀 소비도 자연 감소할 수 밖에 없다.
그럼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밥을 예전처럼 많이 먹지 않을까.
요인은 복합적이다.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서 식습관이 서구화하고 밥 외의 먹거리가 풍족해져 빵이나 국수, 피자 등으로 한끼를 해결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요인 중의 하나일 것이며 또 고기와 생선 등의 소비도 늘어나면서 외식이나 간편식을 선호하는 생활상의 변화도 또 다른 요인일 것이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밥을 먹던 시대에서 맛과 건강을 위해 다양한 음식을 즐기는 시대로 변화되면서 생긴 변화이다.
또 쌀밥을 먹으면 살이 쪄서 다이어트를 위해 조금이라도 적게 먹으려고 식당에서 밥공기 반만 먹고 남기는 사람들도 많고, 아침을 거르거나 다른 대용식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 국민 중 아침을 먹지 않는 비율이 2022년 기준으로 29.8%라고 하니 10명 중에 3명이 아침을 거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쌀밥을 많이 먹으면 살이 잘 찌고 당뇨 등 성인병에 걸리기 쉽다는 인식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분석이 많다. 음식물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연소하기 쉬운 에너지원부터 사용하는데 같은 탄수화물이라 해도 빵과 설탕에 들어있는 단당류는 혈당량을 급격히 높였다가 급격히 떨어뜨리는데 반해 쌀의 탄수화물은 다당류로 단당류에 비해 소화흡수가 느리게 진행돼 혈당을 완만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오기 때문에 인슐린 분비를 자극하지 않아 오히려 비만과 당뇨예방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따라서 달고 부드러운 탄수화물을 멀리하고 밥과 같이 덜 정제된 탄수화물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것일 것이다.
이명주 NH농협은행 양정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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