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낮에는 숨쉬기가 힘들고, 밤에도 잠을 설치기가 일쑤다. 1990년대 까지만 해도 이러한 열대야를 이겨내기 위해 가까운 공원 등 좀 더 시원한 야외를 찾아 잠을 청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꿀팁’처럼 공유되었던 기억이 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한시 ‘소서팔사(消暑八事)’에서 ‘대자리 깔고 바둑두기’와 ‘달밤에 개울가에서 발 씻기’ 등 더위를 없애는 여덟 가지 방법을 소개했다. 에어컨이 대량 보급되기 전인 1990년대까지 우리는 사실상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에어컨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을 지경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 되면 에어컨을 발명한 ‘에어컨의 아버지’ 윌리스 캐리어(Willis Carrier) 박사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공감이 간다. 에어컨을 만든 사람이 인류평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할 정도로 에어컨은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우리가 짜증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가전제품이다. 유례없는 엄청난 폭염이 닥쳤던 1994년 당시 우리나라의 에어컨 보급률은 10%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현재는 실질적으로 80% 이상(국제에너지기구(IEA))의 가구에 에어컨이 있고, 방마다 따로 에어컨이 설치된 가구도 허다하다.
에어컨의 또 다른 기여는 인간 거주 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열대지방이나 사막에도 도시건설이 가능해졌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이 1950년대 이후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에어컨의 보급 덕분이었고, UAE가 두바이를 건설하고, 사우디아라비아가 네옴시티라는 신도시를 추진하는 것도 에어컨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에어컨은 더위 관련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을 40%까지 줄이고 각종 전염병 전파를 막는 등 인류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렇듯 인간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킨 에어컨은 폭염을 이겨내게 해주기도 하지만 폭염을 유발하기도 한다. 에어컨 가동을 위해 전 세계 전기사용량의 10%가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의 4%에 달하는 이산화탄소 19억5000만t을 배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산화탄소는 온실효과로 인해 지구의 온도를 지속적으로 상승시키고 있으며, 폭염, 태풍 등 기상이변을 유발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에어컨 사용을 가급적 자제해야 한다.
‘밤은 잊은 그대’가 되면 숙면을 망쳐 건강이 해롭듯, 여름을 잊게 할 정도로 지나치게 시원한 실내도 사람과 지구 모두의 건강에 해롭다. 에어컨 사용을 1시간 줄이는 것, 냉방온도를 2℃ 높이는 것으로 한 대당 이산화탄소를 연간 14.1㎏, 5.3㎏씩 줄일 수 있다. 우리나라 가구 수가 2325만이므로 단순 계산만으로도 연간 약 45만t의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다. 전기요금 폭탄을 피하는 것은 덤이다.
동서발전도 에너지절약 추진계획을 매년 수립해 실천하고 여름철 적정 실내온도 26℃를 준수한다. 특히 올해부터는 본사 사옥에 새롭게 설치한 건물일체형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을 에너지저장장치(ESS)에 저장했다가 사용하는 방법도 병행하고 있다. 전사적으로는 울산, 당진을 비롯한 4개 사업소에서 93개의 에너지절감 추진과제를 발굴해 올해 1분기만해도 2만7140TOE의 에너지를 아꼈다. TOE(Ton of Oil Equivalent)는 모든 에너지원의 발열량을 석유 1t으로 환산한 것으로, 간단히 말하면 2만7140t의 석유를 아낀 셈이다. 고통스럽게 아낀 것이 아니라 새나가는 에너지를 막는 것, 조금씩 줄이는 것만으로 얻은 이익이다.
기후변화로 폭염이 심해지면 에어컨을 더 많이 사용하고, 더 많이 쓸수록 폭염이 더욱 심해진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 ‘안락함’의 기준을 조금씩만 조정해보자. 우리나라는 OECD 평균보다 약 1.7배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고, 에너지 효율성은 OECD 36개국 중 33위로 최하위권이다. 우리도 선진국의 반열에 접어든 만큼 에너지도 현명한 소비가 필요하다. 나만 좋으면 된다거나 ‘내돈 내가 쓰는데 왜?’라는 사고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를 위해 2℃만 양보하는 가치행동을 나부터 시작해보자.
김영문 한국 동서발전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