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휴가 중 로버트 케이건이 2018년에 쓴 <밀림의 귀환>이라는 책을 읽었다. 지난 4월 법무법인 율촌의 최준영 박사 강연을 듣고 알게 된 책인데, 그때 가졌던 호기심을 휴가 계획으로 정해 미루지 않고 실천한 덕분에 국제정치학에 조예나 특별한 배경지식이 없었어도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통찰과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귀한 경험을 했다.
이 책이 가장 먼저 논파한 것은 지금의 세계질서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주어진 필연이라는 내 선입견이었다. 세계대전은, 비록 두 번이나 연거푸 일어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사고였고, 세계 여러 국가와 사람들이 외교와 무역을 통한 교류를 거듭하게 되면 이것이 일종의 비가역적인 추세를 만들게 되므로, 그 결과 만장일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수가 수용할 수 있는 콘센서스를 찾게 될 텐데, 지금 유지되고 있는 세계질서가 바로 그 답이라는 생각.
그러나 이 생각은 아무리 잘 쳐줘도 현상에 원인을 끼워 맞춘 궤변에 불과하며, 그저 80여 년 전, 그러니까 우리의 조부모님 세대가 살아내야 했던 시절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전 세계는 전체주의와 대량 학살, 독재와 폭정, 전쟁, 빈곤, 기아에 실존을 위협받는 일상이 현실이었음을 설명할 수 없다. 낙관론의 근거가 되는 인류 기술의 진보와 지식의 확장은 히틀러와 히로히토, 그리고 스탈린이 저질렀던 반인류적 범죄를 막는데 철저히 무력했다. 지금의 자유민주정체란 당시로서는 실체를 입증하기는 고사하고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정치체제라고 기대할 근거조차 미미했다.
찬반이 갈릴지언정, 지금의 세계질서가 미국이라는 단일의 초강대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현재의 세계질서는 당연하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 아주 이례적인 현상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특별히 의식하거나 애쓰지 않아도, 인류의 역사 자체에 무언가 의지가 있어서 어떤 목표를 향해 방향성과 필연성을 갖고 나아갈 것이며, 그 결과 강대국의 전쟁도, 독재자의 폭정도, 인종 간 대량 학살도 없는 세계가 마침내 도래할 것이라는 예상은 망상이자 낭설이라는 것이다. 저자인 케이건은, 지금 유지되고 있는 자유주의 질서는 자유주의, 민주정체,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어느 한 나라가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데 따른 것으로서 이는 인류 역사 전체에 비추어 지극히 예외적인 현상이자 인위적으로 조성된 정원과 같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반대를 무릅쓴 대가와 수고 없이는 단숨에 잡풀로 뒤덮이는 밀림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불과 백년도 채 되지 않은 근현대 세계사를 들어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추석을 맞아 고향에 갔다가, 불과 몇 달 사이 묘역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산소를 뒤덮은 망초들에 놀란 적이 있다. 성묘가 필요한 이유이다. 지금의 세계 역시, 역사의 필연 같은 낭만적인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누군가 비용과 품을 들여 잡풀을 뽑아내고 토대를 보수했기에 누릴 수 있는 잘 가꾸어진 정원과 같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말(“Freedom is not free”)처럼,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주의 세계질서와 미국의 역할에 대한 저자의 해석과 주장은 그 자체가 너무나 정치적이기에 또 다른 미국 제일주의에 불과하다고 폄하되거나 그 저의에 대한 의심과 논쟁을 불러오기 쉽다. 그럼에도 이 책의 주장이 갖는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이유는, 이 책이 나온 이후 지난 6년간의 세계가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밀림의 회귀를 떠올리기에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는 11월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와 관련해 양당 후보별 당선 시 예상되는 정책 간 비교를 다루는 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최근 민주당 대선 후보가 해리스 부통령으로 확정됨에 따라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미국 정부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맹국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 양 후보의 외교정책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세간의 짐작과 달리, 두 후보의 정책은 단순히 트럼프의 독선이나 해리스의 바이든 정부 정책 승계만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각 정책이 수립된 맥락과 함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좋은 설명이 있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며 누리는 즐거움이다. 관심 있는 이들의 일독을 권한다.
이준희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