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에 사는 김은경 시인을 만나러 가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 같이 가기가 좀 곤란하다고 했다. 물론 김동휘를 만난다는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금방 만나고 올 테니 저녁에 외식이나 하러 나가자고 둘러댔다. 아내는 할 수 없다는 듯 동행을 포기했다.
나는 약속장소인 태화강 대밭공원이 내다보이는 파스쿠지 커피숍으로 갔다. 주차할 공간을 찾지 못해 커피숍과는 다소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날씨는 제법 쌀쌀해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커피숍 간판이 보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20년 전에 두 번 만났던 사람을 기억해 낼까 궁금했다. 두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20년 동안이나 그리워하던 사람을 전혀 몰라본다면 매우 서운할 것 같았다.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서서 발열체크를 했다. 화상에 비친 숫자는 36.2도였다. 이렇게 얼굴이 화끈 거리는데 온도가 정상이라니 기계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출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는 김은경 시인의 모습이 보였다. 김시인도 나를 바라보았다. 김시인의 앞에 등을 보이고 있는 단발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검정색 투피스가 단발머리와 어우러져 사무적이고 딱딱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은 모피깃이 달린 외투가 아니었으면 외근을 나온 공무원으로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김시인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뒤돌아본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나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다. 20년 전에 내 시신경을 강렬하게 자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파리한 듯 새하얀 얼굴에 움푹 팬 볼우물. 20년 동안이나 내 기억의 끈을 붙들고 있었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파리한 듯 핼쑥한 얼굴에는 남반구의 강렬한 햇볕이 만든 검은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움푹 파인 볼우물은 이마에서 부터 깊게 파여져 내려온 주름살에 묻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김은경 시인이 서로 인사를 시켰는데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20년 전에 집을 방문했었는데 기억하고 있느냐고 했더니 고개를 한 번 까딱했다. 아마도 김은경 시인이 나를 소개할 때 전해들은 것이지 싶었다. 내가 그토록 애를 태우던 사람의 귀에는 숲을 지나가는 바람소리로도 들리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나는 예의상 K의 주검에 애도를 표했다. 형식적인 인사를 받는 그녀의 표정이 특이했다. 주름에 묻혀 있던 볼우물이 희미하게 살아난 것 같았다. 마치 사막에 주저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서는 사람 같았다. 어쩌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할 아무런 말도 준비하지 못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지난 뒤 김은경 시인이 반구대 일원에서의 자연장에 대해 운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