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년 넘게 신어온 구두가
입을 벌렸다 소가죽으로 만든
구두 한 마리 음메- 첫울음을 울었다
나를 태우고 묵묵히 걷던 일생이
무릎을 꺾고 나자 막혀버리는 길,
풀 한 줌 뜯을 수 없게 씌어놓은
부리망을 풀어주니 구두가
길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돌멩이처럼 굳어버린 기억이
그 입에서 되새김질되고
소화되지 않는 슬픔은 가끔
바닥에 토해놓으면서 구두 한 마리
이승의 삶 지우고 있었다
닳아버린 시간을 따라
다시 걸어야 할 시린 발목,
내가 잡고 부리던 올가미를 놓자
소 한 마리 커다란 눈을 감으며
구두 속에서 살며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낡아 해진 구두에서 소의 영혼을 떠올리다

소가죽으로 만든 구두가 닳고 닳아서 구두코가 벌어졌다. 그 모양새가 마치 소가 입을 벌린 것 같다. 처음 입을 벌렸으니 음메, 첫울음을 우는 듯.
소는 본디 밭을 갈고 짐이나 사람을 태우며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유순한 짐승이다.
소가죽으로 된 구두를 신고 온 데를 다니는 것은 소등을 타고 이랴이랴 소를 부리며 다닌 셈. 이제 이 소가죽 구두가 입을 벌리니 여태껏 타고 다닌 소가 숨을 거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구두 한 마리’란 표현이 절묘하다. 발이 구두로 변해가는, 혹은 구두가 발로 변해가는 르네 마그리트의 ‘붉은 모델’이란 그림처럼, 소가 구두가 되었다가 다시 소 한 마리로 변해 이승을 빠져나가는 저 물활론적 상상력. 구두란 외피에 갇혔던 영혼이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송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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