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만나는 문인화 산책]한 송이 들국화를 통해 한해가 저물고 있음을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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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만나는 문인화 산책]한 송이 들국화를 통해 한해가 저물고 있음을 느껴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4.11.11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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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료: 화선지 수묵담채 / 규격: 170 x 70 / 화제: 아대황국묵불언화향아여유정수경엽엽대상기번화편편함추청 / 해석: 내가 황국을 대하여 묵묵히 말하지 않아도 국화는 나를 향해 속삭이는 듯하네, 마른 줄기에는 잎새마다 서릿발을 띠었고 우거진 꽃 하나하나에는 가을의 맑은 기운 머금었네.

세월의 흐름은
꽃이 피고 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봄날 온갖 꽃들이
차례대로 다투어 피고,
때에 맞는 비(時雨)가 내리고,
여름과 가을이 되면
온갖 꽃들은
어김없이 지고 열매를 맺어
다음 생을 준비한다.
늦은 가을에
비를 맞고 있는
한 송이 들국화를 본다.

늦은 가을에 서리를 맞으며 피는 국화는 군자의 덕성에 비유해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여겨왔다. 국화는 가을에 홀로 핀다는 점에 연유하여, 절개를 지키며 고고하게 살아가는 은자(隱者)에 비유되기도 한다.

일찍이 도연명(365~427)이 국화를 예찬한 데서 군자와 국화는 불가분의 관계가 됐다. 도연명은 관직에 있었으나 그 생활이 생리에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 살았다. 그의 시 ‘음주(飮酒)’에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뜻이다. 번잡한 세상사를 피하여 숨어 사는 은자의 초연한 심정을 보여주고 있다.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의 한 대목을 보면 “머언 머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표현했다. 늦가을의 쓸쓸한 정취를 내 누님같이 생긴 꽃으로 비유하여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의 ‘동리채국도東籬採菊圖’는 선면형(扇面形)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평상복을 입은 도연명이 소나무가 서 있는 사립문 옆으로 국화를 따다 남산을 바라보고 있다.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와 도연명의 <동리채국도>의 작품에는 시속에 화의가 담겨 있고, 그림 속에 시의(詩意)가 담겨 있다. 이렇듯 시의 내용을 그리고, 그림에서 시를 읽어낼 수 있다.

가을에 낙엽이 지고 가지 사이에 공간이 드러나고 언뜻 연못의 물이 보였다 사라진다. 벤치에 앉아 연못에서 실려 오는 바람의 향기, 물새가 노는 소리를 들으면 연못이 가깝다는 것을 느낀다. 어떤 대상을 그림으로 그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사방에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사물을 보는 방식은 그 사물을 현재형으로 보지 않고 관계 속에서 본다. 국화를 볼 때 꽃잎과 줄기의 형만 보지 않고 자연과의 관계를 본다. 한 송이 들국화를 그리는데도 그것이 자란 흙과 공기와 바람과 햇빛과의 관계에서 보는 것이다.

그림에서 허실(虛實)의 문제는 중요하다. 실이라는 것은 작품의 형상이 그 대상과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허는 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삼는 대상의 성질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것을 말한다. 예컨대 지금 내가 자연에서 보고 있는 저 들국화는 실이다. 허는 실을 포함하면서 보다 더 깊고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실을 완성하는 것은 바로 허이다. 여기에서 허는 골법을 말한다.

골법(骨法)이란 기본적 형체를 지지하는 동력적인 요소이다. 표면적인 형체는 형체로서 드러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충분히 지지되는 까닭은 그 속에서 생동하고 있는 동력적인 힘의 작용에 의한다. 골기는 드러나지 않는다. 골은 뼈다. 뼈는 살 속에 있어 드러나지 않지만, 골이 튼튼해야 살에 힘이 드러나게 된다.

음악과 문학 작품에도 여백이 있다. 문학 작품에서의 여백은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서 느껴지는 무형의 아우라다. 음악에서의 여백은 쉼표다. 쉼표는 음악에서 음을 내지 않은 것과 그 길이를 나타내는 표를 말한다. 음표와 음표 사이에서 느껴지는 울림이다. 그리고 자연에도 여백이 있다. 자연에서의 여백은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사이에 존재한다. 그림에는 음악적 선율이 내재되어 나타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이 유현(幽玄)이다.

유현은 심원(深遠)한 경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의 모습 속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것으로 사물의 이치 또는 아취(雅趣)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오묘한 정취를 말한다. 국화가 그림의 소재가 되는 까닭은 생명의 순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시 겨울이 되면 국화꽃도 어김없이 떨어지고 매화가 찾아온다. 한 송이 들국화를 통해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글=김찬호 미술평론가·그림=이재영 문인화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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