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붉은 도끼[125]]13부. 흐르는 물(16. 끝) - 글 : 김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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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붉은 도끼[125]]13부. 흐르는 물(16. 끝) - 글 : 김태환
  • 경상일보
  • 승인 2024.11.1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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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동물가죽을 걸친 원시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유촌 마을 물속에서 보았던 환영이 다시 떠오른 것이었다.

나는 영화 촬영이라는 생각보다는 빨려 들어가서는 안 되는 컴컴한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와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얼른 아내를 불렀다.

원시인복장으로 분장을 한 아내가 무리에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내가 내 앞으로 다가오자 원시인 복장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목이 말라. 물을 좀.”

내 말을 듣고 다시 김은경 시인이 물병을 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아내가 물병을 받아 뚜껑을 열고 나에게 건네주었다. 물을 마시고 사람들을 바라보자 모두가 제 모습대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빈 물병을 건네주고 암각화 벽면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내가 가리켜야 하는 문양은 바로 ‘아픈 사랑’이었다. 유리 여사의 그림에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바로 문제의 문양이었다.

내가 문양에 손을 대는 순간 머릿속에서 수많은 아픈 사랑들이 거품처럼 떠올랐다. 마치 병 속에 들어 있던 비누방울들이 한꺼번에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듯했다.

오천 년 전 사흘이라는 남자의 사랑이, 75년 전 김재성의 사랑이, 가깝게는 20년 동안이나 허공을 헤매던 내 사랑이, 거품 속에 섞여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암각화문양에서 손을 떼고 뒤돌아보았다. 아내가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 방금 남편의 자연장을 치르고 온 김동휘가 아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20년 동안 내 가슴을 들끓게 했던 백옥처럼 하얀 얼굴빛에 움푹 팬 볼우물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나는 바닥에 놓인 붉은 돌도끼를 집어 들었다. 왼손으로 돌도끼를 들고 오른 손으로 암각화 속 아픈 사랑을 짚었다. 그 순간 고속열차가 땅을 흔들며 지나갔다. K의 목소리가 열차소리에 묻혀 아스라이 들려왔다.‘도끼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았어요.’

나는 혼란스런 잡념을 떨쳐 내기 위해 큰 소리로 오래된 고대문자를 읽었다. ‘아픈 사랑은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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