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 오픈런 해도 못 사!” “새벽부터 서버 셧다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한 이 물건의 주인공은 고가의 명품이나 유명 아이돌 한정판 굿즈가 아니다. 지난 9월 추석을 목전에 두고 은행 앞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온누리상품권(이하 ‘상품권’)을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인파들로 장사진을 이룬 것이다.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판매 시작 사흘 만에 초도물량이 완판되어 추가 판매까지 진행되었다. 그야말로 ‘상품권 열풍’이 불었다.
상품권은 지난 2009년 전통시장과 상점가 활성화를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200억원 규모로 발행을 시작했는데, 이마저도 사용처 제한과 구입의 불편함 등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상품권 종류가 지류 단일형에서 모바일과 충전식 카드형으로 다양화되고, 사용처도 골목형 상점가와 백년가게로까지 확대하는 등 편의성이 크게 개선되면서 전 국민적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10~15%까지 할인되는 특별할인 판매기간에는 웬만한 인기 아이돌그룹 공연 티켓팅 현장 못지 않다.
상품권은 전통시장 및 상점가의 매출을 증가시키는 실질적인 정책적 효과도 입증되었다. ‘온누리상품권 소비촉진 효과와 활성화 방안 연구’(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2023)에 따르면, 상품권은 약 24%의 추가소비를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내년에는 상품권 발행규모도 올해 5조원에서 5조5000억원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이러한 성과 이면에는 상품권을 악용하는 무리가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다. 일어탁수(一魚濁水)라는 말이 있다. 한 마리의 물고기가 온 물을 흐린다는 뜻인데 상품권 유통시장에서 은밀하게 부정행위를 일삼으며 전통시장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상품권깡’이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상품권 브로커들이 동네 어르신들에게 현금을 주고 개인별 상품권 구매 한도만큼 상품권을 대리 구매하게 한 뒤 수고비 명목의 대가를 지불한다. 브로커들은 이런 방식으로 상품권을 매집한 뒤 가맹점 상인에게 접근해 대리환전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부당이익을 챙긴다. 이 같은 상품권 대리구매와 불법환전 대행 등은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으므로 소비자와 상인들은 브로커들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 가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상인에 의한 부정유통도 흔하다. 전통시장의 빈 점포에 간판만 걸어놓고 상품권 가맹점으로 등록한 후 다른 장소에서 영업을 하면서 상품권을 받는 경우다. 특히, 미가맹 점포에 가맹점의 모바일 상품권 결제 QR코드를 비치해 두고 상품권을 수취하는 경우가 빈번한데, 이 또한 명백한 위법행위이다.
또한, 시장 인근이나 일반상점가를 지나다 보면 ‘온누리상품권 받습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여놓은 가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상품권 가맹점과 경쟁하기 위해 가맹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품권을 받는 것이다. 이런 가게들 중 규모가 큰 곳들은 상품권을 환전할 수 없어 상품권을 받아 납품업체에 결제 대금으로 지급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대형 납품업체는 보통 여러 거래처와 거래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상품권을 받다 보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이게 되고 이는 언제든지 부정유통의 고리로 이어질 수 있다.
소비자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부정유통에 가담할 수 있다. 백화점 근처나 지하철 역사 안에서 갖가지 상품권을 매입하는 가판대 혹은 가게를 쉽게 볼 수 있는데, 그런 곳에 할인 구매한 상품권을 재판매하는 것이 흔히 범하는 사례이다.
이렇듯 상품권의 발행규모와 사용처가 확대될수록 부정유통 유형과 수법도 더욱 진화하고 있어 상품권의 건전한 유통생태계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고 있다.
상품권이 흘러 들어가야 할 곳은 바로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이다. 당장 눈앞의 작은 이익만 좇는 일부 몰염치한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이 제도의 근간을 훼손하는 행위는 중단돼야 한다. 부정유통을 막기 위한 점검 강화와 법·제도적 보완책이 마련 중에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우리 각자가 물을 흐리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절제하려는 의지와 실천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종택 울산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