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분옥 시조시인의 시조 美學과 절제](46)가노라 삼각산아-김상헌(1570~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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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분옥 시조시인의 시조 美學과 절제](46)가노라 삼각산아-김상헌(1570~1652)
  • 경상일보
  • 승인 2024.12.0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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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을 뒤로하고 떠나는 참담한 심정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병와가곡집>

 

▲ 한분옥 시조시인
▲ 한분옥 시조시인

시절이 하 수상하다. 갑신정변의 삼일천하도 아니고, 비상계엄령 6시간을 보낸 하룻밤이었다. 예나 이제나 나라 국방은 튼튼하고, 경제는 든든해야 국민들의 삶이 평온하다. 어느 누구 위정자의 따뜻한 볕을 쬐어 본 적도 없지만 국민으로서 오직 나라 걱정에 심기 어지러운 하룻밤이었다. “아! 君답게 臣답게 民답게” 신라의 충담 스님 안민가(安民哥)를 되새겨 본 날이다.

병자호란 때 1637년 인조 임금이 삼전도의 굴욕인 ‘삼궤구고두례’ 즉, 청 태종에게 3번 무릎 꿇고 9번 땅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절하는 항복 의식을 치른 뒤 김상헌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함께 포로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압송되어 갈 때 충신은 처절한 고뇌를 담아 읊었다. 여기서 삼각산과 한강 수는 조선 땅 전체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만주 심양으로 끌려가서 심양 감옥에서 4년, 평안도 의주 감옥에서 2년 옥고를 치른 후 6년 뒤에야 풀려났다.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가 적의 포로 신세가 되어 떠나던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고국을 떠나야만 했던 충신의 비애가 새삼 느껴져 온다. 패전국의 포로이니 그 생사를 짐작할 길이 없다. 돌아올지 못 돌아 올지도 알 수 없는 길을 끌려가며 분한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김상헌은 예조판서로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다.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임금이 항복하자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만고 충신 김상헌은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였지만, 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하였다. 나라 정치는 임금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국민은 국민답게 맡은 바 소임을 다 했을 때 나라가 바로 서는 것이다. 한분옥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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