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99)]랭스 대성당, 교회가 인증한 왕의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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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99)]랭스 대성당, 교회가 인증한 왕의 권위
  • 경상일보
  • 승인 2024.12.1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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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150㎞ 쯤 떨어진 랭스(Reims)는 파리를 둘러싼 근교도시 중 하나다. 도시라고는 하나 시골 마을만큼 한적하고 조용하다. 경치가 빼어난 것도 아니고, 번화한 도시도 아니니, 일반 관광객이라면 일부러 찾아갈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도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대성당이 프랑스 고딕양식의 대표작 중 하나라는 점을 안다면 결코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중세 석조 예술의 백미라고 하는 고딕양식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보기만 해도 경외심과 신앙심이 절로 솟구치는 거창한 스케일과 조소적 예술성에서 중세 기독교 신앙의 절정기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또한 교회가 이러한 대역사를 추진할 만큼 재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강력한 위상을 차지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랭스 성당은 고딕양식이 출현한 배경에 대해 또다른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프랑크 왕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프랑크 왕국의 시조가 된 클로비스 1세는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496년 그가 도유식을 받았던 장소가 바로 랭스성당이다. 이후 9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왕들은 랭스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며 왕위에 올랐다. 왕권의 정통성이 허약했던 중세의 혼란기에 교회가 왕권의 정통성과 권위를 인증해주었던 셈이다. 더불어 교회의 위상도 국가적 차원으로 올라가게 됐으니 상호부조의 협업이라 할 수 있다.

▲ 프랑스 고딕양식의 대표작 랭스 대성당.
▲ 프랑스 고딕양식의 대표작 랭스 대성당.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그 위상에 부합하는 수준의 성당이 필요했을 것이다.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9세기 초부터 새로운 성당 건축이 시작됐다. 장축이 무려 86m에 달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으로서 금박, 모자이크, 회화, 조각, 태피스트리로 화려하게 장식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도 교회의 위상과 왕권의 권위를 상징하기에는 부족했나 보다. 10세기 이후 보다 거룩하고, 화려하며, 장엄한 교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지속됐다.

12세기 증·개축 공사에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고딕(Gothic) 양식을 적용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주로 경건한 수도 생활을 위한 수도원 건축에서 시작됐다면, 고딕 양식은 신의 권능과 왕권의 위엄을 온 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도시적 건축이었다. 그들은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오르려는 신앙심’의 표현을 고딕양식을 통해 구현하려 했고, 그것은 도시의 위상을 과시하는 지표이기도 했다.

한적한 중세도시의 골목길을 헤매다 만나는 탁 트인 광장, 그곳에서 하늘로 치솟는 거대한 석조 오브제, 고딕 성당과의 만남은 늘 주눅이 들 만큼 경탄스럽다. 고딕 건축의 많은 사례 중에서도 특히 랭스 대성당은 장엄함과 견실함에 있어 걸작 중 걸작이다. 물색없이 크기만 큰 것만이 아니라, 정교하게 조각된 하나의 거대한 석조 예술품으로서도 모자람이 없다.

주 출입구가 있는 서쪽 파사드는 파리 노틀담의 기본 틀 위에 조소적인 화려함을 추가했다. 거창하고 무뚝뚝한 독일 고딕 양식과 비교되는 프랑스 고딕의 우아함이다. 대칭적인 종탑 사이에 중앙 매스를 끼워 넣는 방식은 고딕양식의 전형적 방식이나, 균형감과 경쾌함은 훨씬 빼어나다. 3개의 아치로 구성된 출입부에서 중앙 아치의 크기와 높이를 더 크게 만들어 중심을 강조했다. 중앙 아치 상부에 장미창을 둔 것도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디자인이다.

파사드는 조각과 조소로 뒤덮혀 어지러울 만큼 화려하다. 구조체와 조각품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벽면 전체를 가득 채웠다. 아치 개구부의 테두리는 물론, 아치 상부에 삼각형 박공면까지 성서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서사를 조각으로 표현했다. 벽면을 조소로 장식한 것도 파리 노틀담과 비교되는 점이다. 창틀인 트레이서리도 훨씬 더 경쾌하고 우아하다. 창틀을 구조틀로 만든 이른바 바 트레이서리(bar tracery)가 적용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입면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결코 독립적이지 않고 하나의 양식으로 통합된다. 출입구에 3개의 아치는 2층부에서 좀 더 세장한 첨두 아치(pointed arch)가 되고, 3층부에는 아주 작은 수 십개의 아케이드를 만들어 56인의 유대 왕과 천사들의 조각을 채워 넣었다. 첨두아치라는 통일적인 주제가 반복되면서 층별로 다른 변화를 준 것이다.

로마네스크의 구조방식이 두꺼운 내력벽을 아치로 지탱하는 것이라면, 고딕은 석조이지만 기둥과 볼트, 버트레스를 이용해 구축된 뼈대구조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두꺼운 벽체로 인해 좁고, 어둡고, 폐쇄적인 공간을 피할 수 없었다면, 고딕 건축은 다발 기둥(cluster pier)과 리브 볼트(rib vault)를 이용하여 내부공간을 확대하면서 밝고, 개방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또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통해 내부를 신비로운 빛으로 채웠다.

하지만 외관의 화려함에 비하면 내부는 싱그러우리만큼 단조롭다. 육중한 기둥을 다듬어 작은 원통형 기둥 다발로 늘씬하게 만든 점 정도를 후기 고딕의 장식성으로 볼 수 있다. 본격적인 고딕 후기 사례들에 비하면 회화적, 조소적인 장식성은 그리 화려하지 않은 편이다. 천정의 크로스 그로인 볼트(cross groin vault)도 늑재(rib)의 단순한 4분할 패턴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어마어마한 공간을 경쾌하게 만든 고딕건축의 초기적 성격이다.

12세기 이후 고딕은 서유럽에서 교회건축 양식의 주류를 이루며 발전해 갔다. 높고 장엄한 대성당은 도시의 위상을 과시하는 랜드마크였고, 신앙심의 발로이며, 자부심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 건축양식의 변화만이 아니라 중세도시의 얼개와 경관을 새롭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교회가 인증한 왕의 권위, 왕권을 인증하는 교회의 권위, 고딕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며 새로운 시대의 랜드마크가 됐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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