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도시계획법은 군사정부가 만든 많은 법령 가운데 하나로, 1962년 1월20일에 공포, 시행되었다. ‘울산도시계획’이 1962년 5월14일자로 결정·고시되었으니, 도시계획법에 의해 계획된 대한민국 최초의 도시가 울산이다. 이전에는 일제강점기때 만든 ‘조선시가지계획령’에 따라 도시계획을 수립했다. 법 시행 10일 후인 1962년 1월30일에는 울산도시계획 현상공모가 시작되었고, 4월19일에는 주요 일간지에 당선작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울산시 승격을 보름가량 앞두고 나온 도시계획은 일제강점기때 그린 도시계획과 흡사했다. 그 이유는 일제가 울산항 창설과 유울연락기지 개발을 하면서 남구 매암동, 여천동, 고사동 일대에 수백만 평의 공장용지를 확보해 두었고, 철도와 항만 같은 인프라를 조성하던 그 청사진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공단개발 경험도 공단조성 자금도 부족했던 군사정부로서는 이런 유산이 있던 울산을 공업센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1962년 2월3일 매암동 납도마을 앞 언덕에서 정부 주요 인사와 주한 외교사절, 유엔군사령관까지 초청한 자리에서 박정희 장군은 저 유명한 ‘치사문’을 읽었다. 신정동 공업탑에 새겨진 치사문에는 구구절절 ‘겨레의 빈곤 탈출’을 염원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우리 스스로 처음 작성한 울산도시계획은 주거, 공업, 상업지역과 같은 용도지역과 주요 도시계획시설(철도, 항만, 공원) 등을 담고 있는데, 철도역이 지금의 번영사거리 부근에 자리 잡고 여기서 북으로 번영로가 뻗어 나갔다. 자연스럽게 남구의 번영로 양측에 업무지구와 주거지역 등이 배치되었다.
그런데, 1966년 5월13일에 울산공단 시찰을 온 박대통령은 울산시장이 도시계획을 보고하자, ‘습기가 찬 지대에 도심지를 만든다’면서 즉석에서 “그따위 도시계획이 어디 있느냐”는 호통을 쳤다. 분명 절차를 거쳐서 마련된 도시계획일텐데, 대통령 한 마디로 이 계획은 당장 크게 바뀌게 된다. 도시계획 시행 후 4년 만에 터진 사건으로 번영로 양측의 중심업무지구는 사라지고, 특히 번영사거리에 있던 울산역은 지금의 태화강역 자리로 변경되었다.
재벌이 남긴 마이너스 유산도 적잖다. 첫 번째는 토지 투기다, 1966년 5월24일자 매일경제 신문에는 한국비료와 한국알미늄의 대지 쟁탈전에 대해 “대지값 앙등을 내다보고 자금 조달 방안도 없이 부동산 투자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꼬집으면서 이때 재벌간 다툼 가운데 5비료공장 부지를 박대통령이 지도 위에 손수 볼펜을 굴려 즉결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게다가 이병철 회장의 경우는 회사 앞 2부두 접안 선박 크기를 건설부가 추진하던 2만t급에서 4만t급으로 바꿨는데, 건설부를 패싱하고 청와대에 직접 건의했다 하여 “경제인답게 절차를 경제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울산 도시계획을 흔든 것은 대통령과 재벌뿐만 아니다. 정부 또한 마찬가지로, 석유화학단지와 현대조선소 부지 등도 당초 울산도시계획에는 없었는데, 개발대상지로 선 결정되고, 후에 도시계획이 변경되었다. 이처럼 울산도시계획의 틀이 여러 이유로 크게 바뀌었지만, 합리적 조정은 부족했다. 더구나 1976년까지 2급 중앙공무원인 울산특별건설국장이 이끄는 특별건설국이 울산에 자리 잡고 울산공단개발과 항만, 도로 등의 기반시설 건설을 도맡아 하면서 울산시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울산의 토지이용에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힌 것이 1973년 6월27일에 부산과 함께 지정된 ‘개발제한구역’이다. 이때는 울산시 도시계획 시행 11년 차로 1972년 말 인구는 16만여 명이었으니 목표 인구 50만을 달성하는 82년까지는 한참이 남아 있었다. 1972년에는 현대조선소가 설립되고, 1974년에는 온산공단이 산업단지로 지정됐다. 1975년에는 현대자동차가 단순조립에서 종합자동차공장으로 출범했다. 이렇게 급성장하는 도시와 무관하게 설정된 개발제한구역이 지금처럼 120만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을 왜곡시킨 것은 당연하다.
공해문제와 침수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울산 도심에는 건축물 고도규제를 강제하는 도심 공항도 있다. 이렇게 겨우 남은 가용 토지에 기본적인 주택과 상가, 공장만 넣다 보니 노잼도시가 되고, 지가는 비싸졌다. 실험하듯 흔들린 도시계획과 개발제한구역 때문이다.
한삼건 울산역사연구소 소장·공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