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12월3일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러한 사태는 지난 8·15 광복절 경축식과 19일 ‘을지 자유 방패’ 훈련 첫날 그의 발언에서 이미 예견된 바다. 1971~1972년 ‘국가비상사태’로부터 ‘유신쿠데타’로 이어진 일들이 연상된 때문이다. 윤석열의 말과 행동은 두 가지 점에서 유신의 논리와 매우 흡사했다.
첫째, 박정희와 윤석열은 북한의 위협과 통일을 계엄의 명분과 목적으로 내세웠다. 박정희는 1971년 12월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한국의 안보 상황을 “강대국들의 행동이 제약받게 되는 일반적 상황을 역이용하여, 침략적인 책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북괴의 적화 통일 야욕 때문에, 긴장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라고 묘사했다. 1972년 10월17일 특별선언에서는 “긴장 완화라는 이름 밑에 이른바 열강들이 제3국이나 중소 국가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는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라며 “조국 통일과 민족중흥”을 위해 유신을 단행한다고 주장했다.
윤석열은 8·15 경축식에서 “완전한 광복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며 “한반도 전체가 자유 민주 통일 국가가 될 때” 완전한 광복이 실현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부여된 “자유민주주의 평화통일의 책무”에 따라 통일 전략을 추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19일에는 북한을 “전 세계에서 가장 무모하고 비이성적”이라고 규정하고, 북한의 “회색지대 및 군사적 복합 도발, 국가 주요 시설 타격” 등 다양한 위기에 대응하는 태세를 주문했다.
둘째, 박정희와 윤석열은 북한을 국내정치의 상수로 이용했다. 박정희는 비상사태를 선언할 때는 북한의 위협이 엄중한데도 “무책임한 안보론을 분별없이 들고나와, 민심을 더욱 혼란케” 하는 것이 마치 “6.25 사변의 전야를 회상”시킨다면서 중대한 안보 위기 상황에서는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 일부마저도 스스로 유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특별선언 때는 국내 상황을 “아직도 무질서와 비능률이 활개를 치고, 정계는 파쟁과 정략의 갈등에서 좀처럼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으며, 민족의 숙원을 해결하려는 남북대화를 “위헌이다 위법이다 하는 법률적 또는 정치적 시비마저” 일고 있다고 질타했다.
윤석열은 8·15 경축식에서 “자유 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가치관과 역량”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질서와 규범을 무시하는 방종과 무책임을 자유와 혼동”하거나 “자유 사회를 교란시키는 무서운 흉기”인 “허위 선동과 사이비 논리”에 휘둘리지 말라 주문했다. 사이비 지식인들은 “기득권 이익집단”으로서 “반자유 세력, 반통일 세력”이며, 그들의 전략과 진짜 목표는 “국민을 현혹해 자유 사회의 가치와 질서를 부수는 것”이라 주장했다. 19일에도 유사한 인식과 태도를 드러냈다. 북한의 도발과 위협 대상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이 암약하는 사회 곳곳”이라 적시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면 북한은 반국가세력을 동원해 “폭력과 여론몰이, 선전, 선동으로 국민적 혼란을 가중하고 국론 분열을 꾀할 것”이기 때문에 복합적 대응 태세 강화를 강조했다.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통해 대다수 국민을 적으로 돌렸고 대한민국 역사에 치명적 상처를 입혔다. 또 그는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도 미국의 불신과 불만을 자초했다. 사전에 계엄을 미국에 통보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한미동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사전에 설명했다면 미국은 계엄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것을 감지한 윤석열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싶다. 박정희 역시 유신을 단행하면서 미국의 신뢰를 잃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선포 24시간 전 미국에 유신의 목적과 내용을 소상히 설명해 주었다. 그것이 동맹 간의 예의(courtesy)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변화된 국제정세와 미국의 정책에 대한 박정희의 인식과 선택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유신을 막을 현실적 방안이 없었기 때문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믿고’ 역사의 좌표를 읽어내지 못하는 자들은 ‘악(惡)을 위해 악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더구나 ‘혈관에 오만과 거짓의 피가 흐르는’ 자라면 국민과 동맹국을 속이고 해치는 잔꾀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쥐덫 속에 놓인 치즈’ 신세가 되기 마련이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른 대가로 말이다.
김정배 전 울산문화재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