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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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송사
  • 경상일보
  • 승인 2025.01.2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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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상아 연암초등학교 교사

그런 해가 있다. 보통의 하루에 빨간불이 들어와 갑자기 주춤할 때. 달력에 적은 계획 위에 밑줄을 긋고 미안함을 담아 보내는 문자들. 팽팽하던 줄이 끊어져 탁하고 튕겨나간 뒤에 오는 긴장감. 멈춘 시간 속에서 어쩐지 날짜를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나날들. 영원 같던 시간이 지나갔다.

또 그런 해가 있다. 전에 없던 행운이 따르고 “이게 되다니”라며 감탄하는 날. 체력이 넘쳐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가파른 상승곡선에 괜스레 불안해져 트루먼쇼 주인공인 양 세상을 의심하게 될 때. 출처 모를 자신감에 들떠 실수할까 염려했던 나날들. 찰나 같던 시간도 지나갔다.

소설이래도 연계성 없는 두 장을 함께한 이들이 있다. 창문 하나 힘주어 닫는 것이 힘들 때, 대신 손을 뻗어주고 교과서를 옮겨준 내 키의 반만 한 아이들. 호시탐탐 교정용으로 가져온 집게나 강아지 인형을 어디서 샀냐고 물어오던 아이들. 정제된 배려와 다른 티 없는 호기심은 의외로 위로가 된다. 한없이 얇아져 자꾸만 고개를 숙일 때 지지대가 되어준 이들과 10년 같던 1년을 보내고 다시 함께 한 달 같은 1년을 보냈다. 그런 아이들이 졸업을 한다.

이른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교실, 어딘가 들뜬 얼굴과 사물함을 비운 물건으로 꽉 찬 가방. 각반에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지막 등굣길을 맞는다. 이벤트를 좋아하는 우리 반은 교실 문을 열자 예쁜 편지와 칠판을 채운 글귀, 풍선으로 서로를 반겨주었다. 사람 간에는 처음과 끝이 중요하다지만, 첫인사만큼 괜히 무게를 실어야 할 것 같은 끝인사는 언제나 어렵다. 덕담과 잔소리 중 말을 고를 무렵, 이별이 어색한 아이들은 웃으며 장난을 친다.

언젠가 학생들 기억 속에 남지 않는 교사여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조각난 말마디가 작은 마음에 남아 영향을 준다는 건 그만한 책임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올해는 아이들에게 갚지 못한 고마움과 못다 이룬 약속들이 남아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않고 기억 속에 자리 잡을 명분이 있다.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보낸 자리는 떠난 자리보다 천천히 식는다. 이제는 식어버린 빈자리를 바라보며 정리하지 못한 마음을 배웅하려 한다. 한 끗 차이로 이별은 작별과 다르다. ‘서로 갈리어 떨어짐’을 뜻하는 이별에 인사를 나누는 행위를 더해야 작별이 완성된다. 다가온 이별을 능동적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작별할 수 있다. 또, 한 끗 차이로 작별은 시작과 같다. 작별과 시작은 같은 한자, ‘만들 작(作)’을 쓴다. 가닥 같은 마음을 모아 단단히 맺는다면 다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다. 소중한 이와의 쉽지 않은 이별을 다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들에게 이 글을 부친다. 제대로 작별하며, 천천히 시작하기를.

마지막으로 서로의 변화를 언제나 알아차려준 12년생 아이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배상아 연암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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