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현실을 해석하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흔히 세계관이라고 표현하는 마음속의 그림은 천차만별이다. 경험의 종류나 깊이가 다르고 마음속으로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물리학자의 세계관이 다르듯 각자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이상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자신이 바라는 세계의 모습이 현실에서 반드시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억압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른 의견이나 신념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동반되지 않는 주장은 갈등과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보다 먼저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프랑스에서는 톨레랑스(관용)를 시민들이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존중하고 있다.
자기가 지향하는 세계관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믿음보다 더 진실하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은 과학이 발달하고 인지 능력이 향상돼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기원전 로마를 통치한 정치가 카이사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 그는 유럽의 지도를 지금의 형태로 바꾼 정복자이자 ‘갈리아 전기’라는 중요한 역사서를 남긴 지성인이다.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는 워렌 버핏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람들이 가장 잘하는 것은 기존의 견해들이 온전하게 유지되도록 새로운 정보를 걸러내는 일이다.’ 자신의 믿음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일러주는 말들이다.
중국의 사상가 공자는 나이 육십에 이르도록 육십 번이나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중국의 고전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자신의 판단이나 믿음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는 말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이러하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믿음이나 가치관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믿고 있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반사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생각은 거부하거나 옳지 못한 것으로 평가해야 마음이 편하다. 심지어 정치적 성향이 다르면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사람으로 적대시한다. 우리의 인식이 많은 공통점보다는 다름이나 차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더불어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국가적 혼란도 자신의 신념이나 판단이 절대 틀릴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행이다.
더러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사를 이야기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서슴없이 주장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자신이 지지하는 보수적 신념을 논리적으로 객관화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보수 지향적인 신문은 물론이고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도 함께 구독한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적 신념을 주장하는 그의 언어에는 절제와 균형감각이 배어 있다. 새벽에 일어나서 모든 사설을 빠짐없이 읽는다는 그를 보면 자기의 신념에 진심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수긍할 수는 없어도 그의 태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평범한 칠십 노인도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살펴본다는 말을 들으면 바르게 늙어가는 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릴없는 노인이 이러하거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자신의 신념을 세우는 일에 깊이 고심하고 또 고심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야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판단을 세상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위기 속에서 난무하는 정치인들의 언어 속에는 이러한 고심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평범한 세상살이에도 지혜가 필요한 어려운 시기다. 혼돈의 시간의 건너가는 지혜를 찾기 위해 자신에게 먼저 질문을 던진다. 오래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사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폄하하고 비난한 일은 없었는가.
김상곤 칼럼니스트 철학박사